다해 연중 제 32주일; 부활

부활에 대한 논쟁

 

부활은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내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에 나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내 생각에는…,” 그러면서 불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부족한 한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나는 받아들이면 됩니다. 믿으면 됩니다.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부활에서 멀어지는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굳게 믿으며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1. 부활에 대한 논쟁

예수님 시대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대두되었었고, 유다이즘 가운데는 이에 대해 서로 대립적 입장을 취하는 두 개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였습니다. 사제 계급에 속하면서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을 했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사두가이파는 당파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종교적 귀족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레위 종족이던 사독의 자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귀족이었으나 유대교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외적 신심에는 충실하였지만 종교적 교리를 업신여기고 전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성경만을 받아들였고, 조상들의 전통은 배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적 존재도 다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비웃으며 성경의 수혼제를 빌려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극단적인 예를 들어’ 부활신앙을 공격합니다. 첫 남편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결혼하지 않은 그의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수혼법: 신명 25,5-6 참조)에 따라 계속해서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한 여인의 경우를 들 고 있습니다.

 

②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극단적인 예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루카20,28-33)

율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신명25,5-6)

 

그런데 모세의 이 법은 두 형제가 같은 집에 살고 있을 때에만 적용이 되었는데,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그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궁지로 몰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수혼제는 부활이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행동.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실을 외면하는 행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 모습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

부활한 삶은 우리 현세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만일 현세 생활의 고통을 그대로 갖고서 영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천국이겠습니까? 천국에서도 고통스러워하고, 천국에서도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 사람을 미워하거나 저주하고 있다면 그것이 “천국의 삶”이겠습니까? 또한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겠습니까?

 

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루카20,34-36)

 

하느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참된 기쁨이 지금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는 다를 것입니다. 지금은 불완전한 것들 안에서 행복을 찾고 있지만, 완전한 곳에 가 보면 무엇이 참된 것인지, 참된 행복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희미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일도 아닌 것을 걱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지옥에 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천국 걱정은 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두가이파 사람처럼 예수님과 논쟁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만이 영광스러운 삶에 초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② 영원한 생명

충실하고 성실하게 하느님을 섬긴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상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지금 지상에서의 삶도 영원한 생명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육신이 지금 죽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 앞에는 살아 있으니, 지상의 사람이든, 천상의 사람이든 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20,37-38)

 

모세도 하느님 앞에서 영광을 받고 있고,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간다면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③ 선택

한 형제가 자신과 가까운 이에게 신앙을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네.”하며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도박을 한번 해 보지 않겠는가? 하느님이 계신 쪽에 걸거나, 하느님께서 안 계신 쪽에 걸거나 둘 중의 한 곳에 자네의 모든 것을 걸어보는 것일세.” 그러자 그는 “나는 하느님께서 안 계시다는 쪽에 걸고 살겠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는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 확률이 좋으냐면 하느님께서 계신 쪽에 거는 것일세.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계신 쪽에 걸고 열심히 살아가면 세상에서는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고, 하느님께로 부터는 큰 은총을 받게 되기 때문이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손해 보는 것은 없다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 계신 쪽에 걸고 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며 많은 잘못을 저지르지. 하느님께만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많은 잘못을 하지. 자기만 알고, 이기적이고…, 그렇게 좋은 평판은 듣지 못한다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죽어서 하느님이 안 계시면 문제가 안 되지만,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완전히 망하는 것일세.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쪽에 걸고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네.”그러자 그 친구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확률이 더 높군. 그래! 그러면 오늘부터 신앙을 가져 보도록 하지. 나를 잘 도와주게.”

 

④ 영원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만 중요합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전체가 중요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지금 이 순간은 아주 작은 점(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가끔은 오늘 이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뭐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지…,” 하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래! 너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구나. 참 잘했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영원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다해 31-34주일, 연중시기(다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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