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합니다. 만일 안 된다고 하면 모세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니 백성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릴 것입니다. 또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로데를 공적으로 질책하는 것이 되니 헤로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된다.”고 하면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말로만 그러셨구나!”하면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흥미를 가지고 바라보았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의도를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다른 말씀을 하실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마르10,3) 하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가르침을 몰라서 그렇게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너희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왜 그랬을까요? 신명기 24,1-4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율법에 따라 아내에게서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남편은 그 여인을 쫓아내기 전에 이혼장을 써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이혼은 쫓겨난 여인 편에서 보면, 자기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공적인 문서를 받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재혼을 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양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쫓겨난 아내는 재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쫓아 낸 남편은 그 여인이 두 번째 남편에게도 이혼을 당하든가 사별하는 경우에도 다시금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혼의 구실이 된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란 성경에서는 확실히 또 오직 하나 아내의 불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만일 무엇인가 아내에게 비난받을 중대한 일이 남편 쪽에 있다면 이혼을 할 권리를 잃게 되었습니다(신명22,13-19.28-29). 그리고 유배 이후의 유다인의 성서문학은 혼인을 맺으면 풀 수 없다는 데로 기울고 있었습니다(말라키2,14-16;잠언31,10-31).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10,5)는 말씀을 통해서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닫힌 마음을 가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모세가 왜 그렇게 가르쳤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은 유다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하나의 특권이 아닙니다. 모세는 430년간 종살이하면서 굳어진 그들의 마음 상태를 알고 계셨기에 허용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이혼을 금지하는 법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 종살이하던 이들의 윤리의식을 끌어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인들의 인권을 위해서 이혼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들어 이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혼인제도를 마련하셨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 가정을 이룹니다. 이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묵어 주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고, 사람이 갈라놓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혼인의 불가해소성, 참조: 마르10,6-9).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6-9)

 

제자들이 혼인과 이혼에 대해서 예수님께 다시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10,11-1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잘못된 이혼 관습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남편은 이혼장을 쓸 수 없습니다. 만일 이혼장을 쓰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전처의 권리가 아직 성립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간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혼뿐 아니라 일부다처제까지도 금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도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에서는 여자에게도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풍속이 문란해짐에 따라 여자도 곧잘 이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살다보면 서로 싸우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정말 미워지기도 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구속을 하기도 하고, 비교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정이 상했을 때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살다보면 서로가 할 이야기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일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전과 같아집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노력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이 갈등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서로가 성격이 다르다고 하여 이혼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전에 내가 그렇게 좋아서 쫓아다닌 그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생길 때는 상대방이 좋게 보이고, 상대방이 나를 배려해 줄 때는 마치 세상을 얻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그런 상대방의 사랑에 마음을 활짝 열고 상대방을 사랑합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배려 해 주기 보다는 배려 받기를 원하고, 사랑해 주기 보다는 사랑 받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나 중심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면 서운해 하고, 작은 갈등과 오해들은 미움으로 바뀝니다. 더 나아가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뀔 때는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게 되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큰 힘이 생겨나고 신뢰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미움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때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더더욱 사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워하지 않으려고 더더욱 노력할 때 그 미움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이해하면서 살아갑시다. 용서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리고 인내하면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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