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1821년 충청남도 당진의 솔뫼에서 태어나 부모의 깊은 신앙을 물려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16세 때 파리 외방 전교회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인근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그해 10월 나바위 인근의 바닷가로 입국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뱃길을 알아보려다 1846년 6월 5일 붙잡혀 그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때 나이가 26세의 젊은 나이셨습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가 해로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에 신자들과 함께 서해안으로 나가 5월 29일에 관리들의 감시망을 뚫고 백령도에 도착하여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의 선원들과 접촉하여 페레올 주교님의 편지와 자기의 편지(조선 입국을 대기하고 있는 베르뇌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조선지도 등을 전달하고 황해도 순위도에까지 무사히 돌아왔으나 이곳에서 6월 5일에 체포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해주 감영에 끌려가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받았고, 다시 한양의 포도청에 이송되어 40차례에 걸친 심문과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재판관들과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님의 외국어(중국어, 라틴어, 불어 등) 실력과 폭넓은 서양 지식에 놀랐고, 어떤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님께 지리서 편술과 세계 지도(영국제)의 번역을 부탁하여 옥중에서 두 장의 지도를 채색하여 한 장은 국왕에게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재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위한 구명운동을 벌여 그에 대한 판결이 3개월이나 연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846년 6월에 세실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나타나 기해박해 중에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앵베르 범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들을 처형한 사실을 항의, 문책하는 서신을 주민들을 통해 조정에 전달했습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와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교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신부님께서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셨습니다.
1949년 11월 25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한국의 모든 성직자의 특별 수호자로 선정하였으며,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에 성인으로 시성하였습니다.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무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