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제사 문제와 전통문화
조상 제사문제는 인류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가톨릭 교회가 유교문화권의 동양인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왜곡됨이 없이 전하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교문화와의 조화를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복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각 민족의 고유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여 그리스도교를 그 민족 안에 토착화해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선교의 양면성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어느 일면이 강조되기도 하나 근본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 조화를 통해서만 교회는 본연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과 한국은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사상과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선교에 임한 서양 선교사들은 이 이질적인 유교식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느냐는 난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해 1세기 간이나 논쟁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로마 교황청에서 이 의례들을 미신적인 행위라고 판단하여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되며 이로써 한국, 중국, 일본 등 유교문화권의 극동지방 선교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황청이 이런 금령을 내린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으나 선교정책에 있어 토착화보다는 신앙의 통일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 후 약 200년간 이 금령은 엄격히 준수되어 오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시대의 변천과 교황의 선교정책의 변화에 따라 상당히 완화되었습니다.
외국 선교사의 입국 전교 없이 스스로 천주교에 대해 학문으로 연구한 끝에 신앙으로 신봉하고 또 전파한 초기 조선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와 유교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려는 보유론적 입장을 취했으며, 이런 태도는 당시 지식층을 이론적으로 설복, 입교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교와 천주교의 충돌, 참혹한 피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사건이 발생하니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린 소위 폐제분주사건(廢祭焚主事件)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론적인 논란이 있었으며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과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났으나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었습니다.
1790년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북경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님의 조상제사 금지명령에 따라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그 신주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한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이들은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위패는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상숭배를 신앙과 같이 지켜 오던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마치 ‘모든 계층의 눈동자를 찌른 격’이었으며 그 충격과 파문은 엄청났습니다. 당시의 임금 정조(正祖)는 평소 학자들을 아끼고 천주교도들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조정이 들끓고 상소가 빗발치듯 할 뿐만 아니라 국시(國是)를 어긴 자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이들을 사형에 처하고 천주교도들을 문초했으며 더 나아가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과 함께 전국의 모든 서학서(西學書)를 불태워 버리도록 명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신해박해입니다.
조선에 있어 천주교에 대한 100여 년간의 탄압은 사상적 갈등, 당쟁, 경제적 피폐, 민족적 위기의식 등 여러 배경에서 기인했으나, 이 폐제분주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피의 참사를 정당화하는데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천주교도들은 부모도 모르는 불효자, 인륜(人倫)을 저버린 짐승의 무리로 낙인이 찍히고, 사회 ·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기존 윤리질서와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자행하는 불온세력 내지 비국민(非國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로써 천주교 선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앙의 토착화를 막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점차 서민층으로 확산되어 서민층이 주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조선에서 이렇듯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폐제분주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윤지충과 정하상(丁夏祥)은 공술(供述)과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물질적 음식물은 혼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잠자는 사람에게 음식물을 드리지 않듯이 영원히 잠든 이에게 제물을 차려 봉헌하는 것은 허세요 가식이며, 둘째 신주는 목수가 만든 나무 조각이므로 나의 골육이나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어 부모라 부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어떤 물질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톨릭 교회는 조상께 드리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상을 차리는 것은 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기 위함이며, 가족들이 함께 나눠 먹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것을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곳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전통문화가 단절된 곳에서는 자주 민족의 전통을 보여주어 먼저가신 부모형제를 기억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다음세대에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