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로데와 나
동방박사들은 마구간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마구간의 주인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만일 마구간의 주인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면 주인은 자신의 누추한 집을 기꺼이 아기 예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산모가 아이를 낳는데 어떻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지 않았을까요? 볼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그 이면에 있는 깊이 있는 가치를 알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내 집을 예수님께 내어 드릴 수 있고, 그래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린 동방의 박사들은 이제 헤로데에게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와 위치를 알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마태2,12)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헤로데의 음흉한 생각을 꺾어 버리십니다.
가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데 상대방은 그런 나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헤로데가 자신들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른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동방박사들의 처음 생각처럼 그렇게 순수한 행동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해가 될 수 있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상대방을 위한다면 좀 더 현명해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본당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본당의 일을 모두 배우자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결정되지도 않는 이야기나, 대충 전달된 이야기들은 배우자의 입을 통해 “결정되고, 완전한 것으로 탈바꿈”하여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한다면 하지 말아야 될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부족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 옆에 있는 이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모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봉사하다가 생긴 사소한 갈등이 “아무 생각 없이 떠든 내 말을 통해서” 한 사람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멸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수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을 복잡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의도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뒤에서 말을 만들어 주저앉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고,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착각을 합니다. 마치 헤로데처럼 말입니다.
동방박사의 경배와 마구간 주인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이용하려는 헤로데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내 안에 있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고, 헤로데의 모습이 아니라 동방박사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