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받은 이의 선포

치유 받은 이의 선포

이제 소경이었던 이는 분통이 터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요한9,27)

 

남을 깎아 내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 합니다. 결국 자기가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심한 모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모욕을 가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모욕을 받은 것 뿐 입니다. 모욕을 받은 이들은 소경이었던 이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요한9,28-29)

 

이것은 예수님을 경멸하고 모세를 존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임은 수치이지만 모세의 제자임은 영예라는 뜻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대립된 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표현에서 바리사이들이 곧 율법학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변호하는 이 말 안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인 자신들이 소경이었던 이보다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소경은 조금이라도 알아 뵈었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전혀 못 알아 뵙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 입으로 고백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를 모릅니다. 모세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모르고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뜬 이는 이제 유다인들을 가르칩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요한9,30) 신앙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분별하고 해결해주면서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의 일을 식별할 줄 모르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있는 것이 장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합리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르고 있는 것들은 배워서 내 몸에 익히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한 내 옆에 있는 이가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칭찬하고 격려하며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을 바리사이들에게 가르칩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9,31-33)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뜨게 된 이는 자기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과 둘째,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의로운 이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십니다. 소경이었던 이의 기도는 늘 보게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예수님께로부터, 예수님을 통하여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논리적으로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거 합니다.

또한 이 소경이었던 이는 단순하게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의 신앙이 평생을 신앙을 연구하고 신앙생활 해온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진리란 복잡함에서 오지 않고 단순함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확고한 사실은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성경을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소경이었던 그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또한 어찌 보면, 이것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지한 사람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주 작은 꼬맹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모른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는 이들에게 새 영세자들이 가르치는 것일 수 있고, 봉사직무를 맡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 직무를 맡지 않은 신자들이 가르치는 것일 수 있고,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평신도들이 가르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요한9,34) 하면서 소경이었던 이를 쫓아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불행을 부모의 죄로 돌리고, 그를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몰아세웁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이 보이자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 이 모습은 일상생활 안에서 많이 들어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이들을 혼내는 부모님들의 모습 안에서. 말문이 막혔을 때 배우자를 공격하는 모습 안에서…, 그래서 이제는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화를 낼 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부족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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