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받은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

치유 받은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

눈을 뜬 소경을 본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소경이었고, 구걸하던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치유 받은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그들은 소경이 눈 뜬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 사람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논쟁할 때, 소경이었던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한9,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을 뜬 소경과 함께 기뻐하지 않고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요한9,10) 소경이었던 그는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요한9,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말을 했습니다. 눈을 뜬 이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기쁨에 넘쳐서 흥분하면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나에게 당신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고 있습니까? 안 하고 있습니까? 안 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 말씀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된 저를 좀 보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믿고 있다면 믿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의 기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기쁘냐? 참 다행이다. 축하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소?”(요한9,12) 그러나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여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사람들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기에 눈을 뜬 소경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로 데려 간 것입니다. 당시 종교와 관계있는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바리사이들의 일이었고,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그것이 사실인지 바리사이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치유 받은 소경의 기쁨에는 관심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소경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려오자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치유 받은 소경은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요한9,15)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도 치유 받은 소경의 기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축하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처럼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 받은 소경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비록 축하는 받지 못하고 있다할지라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치유 받은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요한9,16)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먼저 기뻐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했다하여 어떻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을까요?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해 준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니 소경의 치유를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하여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정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인이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을 이들은 받아들이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만일 나에게 안식일이라고 하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분명 미뤄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딸이 고통 속에 있다면 반드시 치유 받으려 할 것입니다. 남의 일이기에,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따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일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함부로 하는 것이고, 그 순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주변 사람들이나 그것을 통해 영향을 받게 되는 이들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이제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는 사람과 죄인으로 보는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멀었던 이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습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요한9,17)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경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온전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체험한 만큼만 고백을 합니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요한9,17)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다인들은 이제 기적 자체를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즉 소경이었던 사람이 원래는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의 부모를 불러서 묻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요한9,19) 그들이 듣고 싶은 대답은 소경이 아니었다.”는 대답일 것입니다.

 

가끔은 거짓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수라고 하면서 그것을 눈에 발라서 보이게 되었다고 과장 선전을 합니다. 먼 타지에서 일어난 일을 선전하면 확인할 방법도 없는 것을 이용합니다. 또 그런 선전이 이루어지고 나면 교회가 아무리 아니라고 진실을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한다고 말합니다.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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