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요한11,1-2)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와 그의 자매들과 각별히 지내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집에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닦아 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어가자 동생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11,3)라고 알려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라자로의 병을 알리면서도 “저희 집에 오셔서”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다고만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 드립니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라자로를 예수님만이 살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묵으셨다가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요한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로 가자는 말씀에 제자들은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요한11,8)하며 여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 가시면 예수님께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랑이의 입 속으로 왜 스스로 들어가려고 하시는지 제자들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을 하러 올라가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로 가시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의 때(십자가의 죽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의 때가 다가오면 그 때 비로소 유다인에게 잡혀 수난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지금 제자들만 보입니다. 수난과 죽음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을 걱정해서입니다. 제자들이 굳은 믿음이 있어야 만이 온 세상에 가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와 함께 계셨다면 라자로는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을 더 키워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요한11,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라자로에게로 가면 죽은 라자로를 제자들이 볼 것이고,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게 될 것이고, 더욱 큰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두려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만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이때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11,16)라고 말합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이 닥친다 할지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굳은 결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도 그런 결심을 갖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만일 토마스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봅시다. 두려움에 떨면서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못가겠으니 예수님 혼자 다녀오시지요. 혹시 예수님과 동행하실 분들은 함께 다녀오세요.”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을까요? 사람의 마음은 어려움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죽음 앞에서 그의 진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나의 진심은 무엇일까요? 나에게는 토마스와 같은 마음이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