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제 3과 사도들의 삶(2) 사도행전

3: 사도들의 삶

감옥에 갇힌 사도들과 대사제의 심문

대사제는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습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사도5,20)

 

그 말을 들은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의 모습 안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사제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경비병들은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5,23)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5,25)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몹시 당황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도들을 성전 경비대장은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경비대장과 경비병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는 사도들을 신문하였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사도5,28)

 

그런데 이들은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그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27,25)라고 다짐하였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대사제의 심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다음 빈칸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하는 것이 더욱 ▢▢합니다.”(사도5,29)

 

베드로와 사도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해야지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하느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보다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에게 더욱 순명하고 있는 모습을 내 자신의 모습 안에서 발견합니다. 사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본다면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탈출기 1장에 하느님께 순종하는 여인 두 명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시프라와 푸아였습니다. 이 의로운 여인들은 산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인이었습니다. 파라오는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이집트 임금이 그들에게 분부한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었다“(탈출기1,17). 산파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요, 또한 그들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이 여인들을 불러 왜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사람이 왕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두려움과 죄의식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 여인들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그른 일인지를 알고 있고,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도 알 고 있었습니다. 산파의 역할은 갓 난 아이의 성별을 구별하여 살리고 죽이는 역할이 아니라 산모가 아이를 잘 낳도록 도와주고, 아이가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자신의 욕심으로 산파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고 말씀하시면서 유다인들의 무딘 마음을 질책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은 파라오를 질책할 수 없다. 이 여인들은 이렇게 핑계를 댔습니다.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는 달리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탈출기1,19)

 

이 이집트 산파들은 히브리 백성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어 주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께서 세상의 주인이심을 알았고, 그 하느님을 파라오보다 더 경외하고 두려워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산파들의 모습 안에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말이 결국 유혹이라는 것,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산파들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파라오의 명령이니 죽일 수밖에…,”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쳐 올 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매님! 성당에서 봉사 좀 하시죠.” 이런 말에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거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싫습니다. 제가 신부님계실 때 이 봉사를 하면 지금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를 두고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부님께서 천년만년 여기 계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신부님은 떠나실 분이시고, 저는 여기 남아서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못합니다.”

 

누가 옳을까요? 당연히 하는 사람이 옳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다보니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산을 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해서 봉사(?)하게 될 것이고, 그런 활동을 통해 결국 성당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나봐……,” 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믿는 이들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이 믿음을 통해서 공동체는 성장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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