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
성령강림은 교회의 탄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셨는데, 지금 이 순간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는 시점. 이 순간을 교회의 탄생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수정된 순간부터 한 인격체로 존중을 받는데, 아이의 생일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온 시간을 생일로 정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교회가 세상에 소리를 터뜨리는 시간이니, 교회의 생일인 것입니다.
나 또한 믿음을 고백하며 증거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고,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 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입니다.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복음을 믿어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31절에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3,31)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십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땅에 속한 것이고, 땅에 속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새로 나야 합니다. 육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영을 따라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새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코데모에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새로 난다는 것.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난 다는 것. 말은 쉽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하고,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날 수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새로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소서! 성령님!”하면 “새로 나게 하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 나갑시다.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삶이 아니라 변화된 삶이 필요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성당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성덕이 뛰어나거나 하느님 나라를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위로부터 태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현재의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땅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지 말고, 나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의로운 삶으로 착각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고개를 들지 못하면 결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일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3,4)
니코데모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새로 난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바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나는 것,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새로 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은 구약성경에서 축복 또는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 주리라”(요엘2,28). 영광 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 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나는 ① 하느님을 믿고 찬미와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②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③ 수덕생활을 통해서 과거의 악습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의로운 삶으로 성숙시키고,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3,6)
육은 영적인 삶을 지향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며,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 안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삶은 영적인 삶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에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시고자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삶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에서 영으로서의 삶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넷째,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 2
그리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버리고, 공동체와 일치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를 도와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육적인 삶에 머무르려 하는 사람들은 이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내 틀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때 나는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끼고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3,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연기 안 나는 쪽에 앉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한테만 연기가 올 때도 있습니다. 바람은 어디로 불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내가 원할 때나, 그분께서 원하실 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나를 움직이게 만드십니다. 또 육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영적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새로 난다는 것. 새로운 마음을 갖고,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하고, 새롭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 나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새로 나야 합니다. 어찌 보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내 형제 자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새로 나야 합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겠지요. 옳지 않았다면, 부족했다면 옳은 방법으로, 보충하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요한3,7)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삶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내 틀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때, 나는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끼고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3,8)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틀을 가지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면 틀리거나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할 때나, 그분께서 원하실 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다시 의문을 제기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니고데모는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3,9)
어찌 보면 이 의문은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일안에서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오는 말이 바로 그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일들은 신앙적인 면 안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내가 믿기 어려운 것들,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요한3,10)
새로 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새로 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보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니코데모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메시아 시대의 징표로서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풍성한 하느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이사야44,3,59,21;즈카르야12,1;요엘3,1) 영이 이와 같이 풍성하게 임하고 넘쳐흐른 결과 사람에게는 참된 내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을 일도록 해 주리라. 그들의 몸에 박혔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리라. 그래서 나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을 지켜 그대로 실행하도록 만들겠다. 그제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키엘11,19-20).
성령 안에서 나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매 순간 성령께서는 나를 새롭게 이끄십니다. 변화된 내 삶은 내적인 변화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삶, 주님과 함께 있기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는 삶, 주님과 함께 있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삶, 주님과 함께 있기에 늘 새로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찬미합시다.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이끄실 수 있도록 나를 맡겨 봅시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제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