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기 위해서 서울 마포를 떠나 황해도 앞바다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중국 어부들에게 편지와 지도를 건네고 돌아오다 6월 5일 타고 온 배를 징발하려는 관헌과 순위도에서 언쟁을 하다 체포되셨습니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님은 등산진영장에게 채이고 뜯기며 수모를 겪다가 해주 감사에게 보내어져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1846년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감금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옥중에 있던 1846년 8월 1842년에 동행하려 했던 불란서 함장 세실이 3척의 배를 이끌고 서해 충청 외연도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3명의 불란서 선교사를 살해한 연유를 묻는 서한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9월 5일에 조선 조정에서는 묘당회의를 열어 서양 배의 출몰에 대하여 논의하다 김대건 신부님의 ‘조속한 처형’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1846년 9월 15일 헌종은 어전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처형을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자, 임금은 김대건님의 목을 잘라 매달아 백성들을 경계심을 품게 하라는 ‘효수경중’(梟首警衆)을 윤허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오전에 서울 한강 모래밭 형장인 새남터로 끌려나가셨습니다. 어영대장이 사형집행문을 읽자 김대건 신부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천주교를 신봉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형리들은 김 신부의 옷을 벗기고, 화살로 두 귀를 뚫어 매달고, 얼굴에 물을 끼얹고 회칠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대기를 겨드랑에 끼워 구경꾼 앞을 세 바퀴 돌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머리채를 잡아 묶어 기둥에 매고 12명의 망나니들이 빙글빙글 돌며 전쟁놀이 춤을 추며 김 신부의 몸을 칼로 베다가 8번째 칼날에 목이 떨어졌습니다. 순교하신지 40일 만에 교우들이 김 신부의 시신을 한강 백사장에서 경기도 안성 미리내에 안장하였습니다. 그후 1901년 서울 용산 신학교로 이장되었다가 6.25 사변으로 경남 밀양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수복 이후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에 모셔졌다가 대신학교로 옮겨 모셨습니다. 그 후 유해를 분산 봉안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김대건 신부님은 1858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복자품(福者品, Beatus)에, 1984년에는 성인품(聖人品, Sanctus)에 올려지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