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임금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18,23-35)
예수님께서는 참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위해 자비로운 임금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왕과 종이 셈을 하는 이야기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①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습니다. 일만 탈렌트는 커다란 액수입니다. 1데나리온 한 사람의 하루품삯이었고, 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5만원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5만원 * 6,000 * 10,000 =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 왜 그 많은 빚을 졌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많은 빚을 임금에게 졌다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이 종이 임금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② 자비를 청하는 종과 자비롭게 탕감해주는 임금
임금은 종에게 원칙대로 빚을 다 갚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종은 임금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간청하였습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18,26)
이 종은 엄청난 빚과 임금의 명령 앞에서 “엎드려 절하며”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③ 자비를 청하는 동료와 무자비한 종
임금으로부터 만 탈렌트라는 엄청난 채무를 탕감받은 그 종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빚진 것을 갚아라.”(마태18,28)
그러자 그의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18,29)
백 데나리온은 그리 크지 않은 돈입니다. 그의 동료가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엎드려 간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일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종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게 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기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그런데 무자비한 종의 모습은 내 안에서 발견됩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나 또한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멸망을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항상 처음의 마음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 처음의 마음을 잊어버립니다. 주님의 은총을 잊어버리니 어느 순간 감사가 사라져 버렸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④ 임금의 분노와 심판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마태18,31)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합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처한 이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형제자매들의 관계를 깨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눈을 감고 있기에 고통당하는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동료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습니다. “분노해서가 아니라 안타까운 나머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그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자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은 종은 다시 주인 앞으로 불려왔습니다. 주인은 자신이 원했던 것을 말해줍니다.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18,32-33)
이 종은 악한 종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받은 것이 무슨 그리 악한 모습이냐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 빚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일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은 용서 받은 죄인들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결코 값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렇게 갚을 수 없는 것을 탕감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은 오로지 주님 밖에는 안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께로부터 탕감 받은 이들은 다른 이들의 빚도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자비를 입었다면 당연히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이들은 용서하는 이들이어야 하고, 자비를 베푸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없고, 지금까지 입은 자비까지도 빼앗겨 버리게 됩니다. 혹시 내 삶은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쫓아 달려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