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입법자였습니다. 모세 이후로는 조상들의 전승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율법학자들의 관심사는 모세 율법과 아울러 거기서 발전된 전승을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을 뜻을 알려 주었습니다.

율법학자 제도는 에스델 시절(기원 전 5세기)의 것인데,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이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말은 지켜라! 그러나 그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율법학자들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로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의 자리를 이은자들 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가르칠 때는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말로만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은 아무런 힘을 낼 수 없습니다. 올바른 표양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만 하게 된다면 어느 순간 그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의 행동 때문에 그 가르침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 백성에게 큰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인지라 그렇게 위선적으로 살기도 하고,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율법작자들의 위선: 말만 하고 행동은 하나도 없는 것.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풍자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23,4)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시며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노새와 낙타의 등에 엄청난 짐을 실어 놓고, 그 짐을 옮기는 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장사꾼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하면서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결례, 안식일, 단식과 기도 등을 생각해 보면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규정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누르는 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 자신은 겉으로는 신심을 가장하면서도 자기네를 위해서는 그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 번째 죄는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작자들의 위선: 보여주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허영심을 꼬집으십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 남에게서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것. 명예로운 호칭을 좋아 하는 것. 이것은 허영심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23,5)

 

성구 넣는 갑은 그리스 말로 부적이라는 뜻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미신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구 넣는 갑은 조그만 갑인데 그 속에 탈출기 13,1-10. 11-16 그리고 신명기 6,4-9;11,13-21절까지의 글귀를 양피지에 써서 넣었습니다. 작은 갑은 왼팔이나 이마에 달고 다녔는데, 지금도 유다인들은 기도할 때 그것을 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신명기 6,8)는 말씀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속함을 표시하는 것이고, 경건한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을 내적으로 충실히 지킨다는 가시적인 표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표지가 내적인 것을 반드시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서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이 중요하고,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물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작자들의 위선: 존경받는 것을 좋아함.

당시에 회당이나 사람들이 모인 행사의 자리는 나이의 차례에 따라 앉게 정해져 있었으나, 위엄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 순으로 정해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영 다툼의 근원입니다. 자리 그 자체에 위아래를 정하는 것은 질서를 잡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명예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윗자리 다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23,6-7)

 

또한 잔칫집에 간 이유는 나를 뽐내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축하해 주기 위해서 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자신의 허영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앉은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 가장 편안한 자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그 자리에 천년만년 앉아 있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굳이 자리에 신경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인사를 받는 사람을 마음과 이마와 입에 새겨 두고 싶다는 그런 뜻으로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동그라미를 그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이들에게 윗자리를 내 주지 않고, 인사해 주지 않으며, 스승이나 아버지로 불러주지 않으면 얼마나 당황하고 분노하겠습니까?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이유는 내가 그만큼 권위적이기 때문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가해 31-34주일, 연중시기(가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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