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

1. 말씀읽기: 마태4,12-25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마르 1,14-15 ; 루카 4,14-15)

2. 말씀연구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를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릴 것입니다. 나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꾸며야 하겠습니다.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직분을 준비하기 시작하신 곳이 갈릴래아였고,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활동도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려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루카 4,1-13)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함께 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뜻 안에서 살아가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카파르나움은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서 서쪽으로 10리쯤떨어진 곳에 있는 어촌입니다. 거기에는 세관도 있었고(9,9-13 참조),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의 소부대도 주둔해 있었습니다(8,5-13 참조). 그리고 카라프나움 회당 아래에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으니,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사시는 동안 그 곳에 묵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삶이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경계를 없애고 우리를 뒤섞어 놓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복음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유다인들의 사고를 넘어 온 인류에게로 확장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는 그들에게 임마누엘이라는 메시아의 빛이 비칠 것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구원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들에게 빛이 떠오른 것입니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그런데 갈릴래아는 유대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방인의 갈릴래아”로부터 솟아났습니다. 왜 유다인들이 갈릴래아를 무시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① 예수님시대의 갈릴래아는 유대인들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13-12세기경 열두 지파 중 아셀, 즈불룬, 아싸갈, 납달리 그리고 후에 단 지파가 이 지역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만났고 그들과 타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정착 과정 만이 아나라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600년 동안 갈릴래아는 외세의 강점과 지배 아래서, 순수한 인종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783년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 빌레셋이 갈릴래아 지역과 요르단 강 건너편 길르앗 지역 및 지중해안 지역을 병합한 이래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갈릴래아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민족들의 이동이 빈번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맨 처음 언급한 “이방인들의 갈릴래아”(이사8,13-9,1; 마태4,15)는 잡다한 인종들의 거주지인 것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이 순수한 유대 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갈릴래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갈릴래아를 다스리지 못했기에 갈릴래아의 이방화는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심화되었습니다.



②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인의 강한 액센트를 조롱했습니다. 갈릴래아인은 “H”,가 없는 “아레프”와 “H”가 달려 있는 “하인”을 똑같게 발음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갈릴래아인이 어느 날 한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소?” 유다인은 대답하였다. “어리석은 갈릴래아 촌놈이군. 타는 하모르(당나귀)인가? 마시는 하마르(포도주)인가? 입는 아마르(모직)인가? 먹는 임마르(양)인가? 알 수가 없구나.”



③ 갈릴래아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고 이방인들의 영향에 대해서 조심성이 덜했기 때문에 유대 전통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고, 남부 유대 지방 및 예루살렘과 긴장 관계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환상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고 자유를 사랑하는 자들로서 더러는 혁명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러한 갈릴래아에 대한 남부 유대적 시각은 부정적이고 때로는 경멸적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라는 말은 그래서 때로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④ 갈릴래아 지역은 비옥한 땅이어서 농업 소출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갈릴래아 사람들은 로마 정부의 무자비한 세금 징수와 팔레스타인에서 부과된 종교세(11조)는 비옥한 지역 농민들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헤로데 왕은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농 지주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 땅을 포기하게 되고, 소작인으로, 그 다음에는 날품팔이로 몰락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등지에서는 그들의 땅을 가진 지주들이 늘어갔습니다.

   갈릴래아 주민 대부분의 생계비는 연 200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들을 시골뜨기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멸시의 대명사였습니다. 또 바리사이들은 그들을 저주받은 자들로 보았는데, 그들이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지주들은 곡물을 매점한 후 곤궁기에 방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권력자들은 갈릴래아의 주산물인 밀, 기름, 포도주 등을 엄격하게 독점 통제해서 무역업자들과 직거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습니다.



 ⑤ 갈릴래아는 유다의 편에서 보면 지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변방에 속하는 지방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불렸습니다. 갈릴래아에 사는 사람들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는 약속된 땅의 변두리로, 그 주민들은 하느님 백성에 속하기도 어려운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소외 계층과 외국인들은 유다인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유다인들로부터는 멸시를 받아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에 구원은 그들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까지 흘러갈 것입니다.

 갈릴래아가 왜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불렸으며,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족속으로 취급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다면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들의 기막힌 가난, 노예들이 겪는 부자유, 그리고 막노동을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아셨습니다. 차별받는 것을 아셨고, 무시당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는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힘과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하며, 그 사랑과 자비를 입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린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입은 사람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십니다. 내가 내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충실하게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또 다른 소명을 부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가 보던, 보지 않던 간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성실함을 늘 보고 계십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런데 사람을 어떻게 낚을까요? 낚아서 어디에 쓸까요?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사람은 고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고, 그 고기를 잡아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먹게 하기 위해 말리기도 하고, 생으로 먹을 수 있도록 제공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낚아서 더 충실하게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고, 하느님께는 기쁨을 드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낚아서 그들이 하느님을 믿게 하고, 자신들과 같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의 보수처럼 그런 보수는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것 때문에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신앙이라는 배를 타고, 믿음이라는 그물을 세상에 내려, 사람들에게 “신앙인의 멋진 삶”이라는 미끼를 보여주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끌어 올리는 사람들입니다. 나 또한 신앙의 배에 몸을 싣고, 믿음의 그물을 내려, “신앙인의 삶이라는 미끼”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즉시 응답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즉시 응답하는 것”이기에 다른 모든 것들은 생략하였을 것입니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철저히 믿어진 복음만이 생활을 변화시킵니다. 마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이들은 지금까지 충실하게 해 왔던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탈바꿈 합니다.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님과 역사가 매순간순간 보여줄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과거의 고기잡이 기술은 그것이 요구하는 신체적인 자질 외에 윤리․도덕적 자질 즉 인내, 강인성, 주위의 위험에 대처할 능력, 희생정신 등으로 변모되어 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모범적 예” 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부르신 분이 정해놓은 길을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행한 첫 걸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그의 과거 생활과 갈라놓습니다. 이렇게 해서 따르라는 부르심은 즉시 새로운 상황을 만듭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전에 있던 삶의 방식은 버려야 합니다.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따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순명하는 정신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순명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결코 응답할 수가 없으며, 참된 신앙생활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그물(아집, 교만, 위선, 게으름, 욕심, 불신, 불순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봅시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봅시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당신의 양떼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나 또한 형제 자매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만”이 아니라 “모두” 말입니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큰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나 또한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께로 모여들게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이들에게 놀이터에서 전교를 합니다. “야! 성당가자!”그렇게 아이들이 친구들을 성당으로 데리고 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께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듭니다. 이들이 서로 다투듯 예수님께로 모여든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한 점도 있었으나, 한 편 이기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기적으로 육신의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셨습니다.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들려 주셨고, 또 치유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병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오던 간에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내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왔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하지만 예수님께로 나아온다면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나는 내 일상의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습니까?



2.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내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무엇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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