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1/22)

    성녀 체칠리아는 로마에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의 출신이며,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그녀의 순교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로마 황제 알렉산더 치세(225-235년 재위)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에 대한 신심은 박해 시대를 통해 전파되어 중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을 의미한다. 성녀는 흔히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말씀의 초대
    내세를 믿지 않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것도 구약 성경의 신명기에 바탕을 둔 질문이다. 예수님의 말문을 막아 웃음거리로 만들 속셈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차분하게 답하신다. 저세상에 참여할 이들은 따로 있다는 말씀이다(복음).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부활은 현실이 그대로 지속되는 부활이었습니다. 부자인 사람은 그대로 부자가 되고, 자식 많은 사람은 저세상에서도 수많은 자녀들을 거느리는 부활이었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은 기가 꺾이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현실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의 최강자인 로마에 복종했고 그 그늘에서 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 사상을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억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인과 혼인했다면 저세상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지 질문한 것입니다.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내용을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레비라트(Levirat) 법〔嫂姻法〕으로 알려진 유목 사회의 독특한 법입니다. 형제가 혼인하여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으면 형제 중 한 사람이 형수나 또는 제수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을 경우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후손으로 삼아 혈통을 잇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생활은 이 세상에 속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세상의 일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삶입니다. 현실에서 평화와 기쁨으로 살지 못한다면 저세상에서도 평화와 기쁨은 요원한 것이 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내 영혼의 찬양 / `God Is So Good`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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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1/22)

      성녀 체칠리아는 로마에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의 출신이며,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그녀의 순교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로마 황제 알렉산더 치세(225-235년 재위)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에 대한 신심은 박해 시대를 통해 전파되어 중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을 의미한다. 성녀는 흔히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말씀의 초대
      내세를 믿지 않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것도 구약 성경의 신명기에 바탕을 둔 질문이다. 예수님의 말문을 막아 웃음거리로 만들 속셈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차분하게 답하신다. 저세상에 참여할 이들은 따로 있다는 말씀이다(복음).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부활은 현실이 그대로 지속되는 부활이었습니다. 부자인 사람은 그대로 부자가 되고, 자식 많은 사람은 저세상에서도 수많은 자녀들을 거느리는 부활이었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은 기가 꺾이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현실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의 최강자인 로마에 복종했고 그 그늘에서 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 사상을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억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인과 혼인했다면 저세상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지 질문한 것입니다.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내용을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레비라트(Levirat) 법〔嫂姻法〕으로 알려진 유목 사회의 독특한 법입니다. 형제가 혼인하여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으면 형제 중 한 사람이 형수나 또는 제수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을 경우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후손으로 삼아 혈통을 잇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생활은 이 세상에 속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세상의 일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삶입니다. 현실에서 평화와 기쁨으로 살지 못한다면 저세상에서도 평화와 기쁨은 요원한 것이 됩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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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uest 님의 말: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1/22)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의 멸망은 두고두고 충격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바로 종말이 올 줄로 알았다.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의인들과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계속될 것이다. 예언자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제1독서).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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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uest 님의 말:

    부활에 대한 논쟁

    1. 말씀읽기:루카 20,27-40

    부활 논쟁 (마태 22,23-33 ; 마르 12,18-27)

    2. 말씀연구

    가끔은 오늘 이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뭐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지…” 하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래! 너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구나…잘했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 시대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대두되었었고, 유다이즘 가운데는 이에 대해 서로 대립적 입장을 취하는 두 개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였습니다. 사제 계급에 속하면서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오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극단적인 예를 들어 부활신앙을 공격합니다. 첫 남편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결혼하지 않은 그의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수혼법: 신명 25,5-6 참조)에 따라 계속해서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한 여인의 경우를 들 고 있습니다.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사두가이파는 당파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종교적 귀족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레위 종족이던 사독의 자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귀족이었으나 이스라엘의 순수 종교와는 먼 거리를 두고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외적 신심에는 충실하였지만 종교적 교리를 업신여기고 전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성서만을 받아들였고, 조상들의 전통은 배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적 존재도 다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한 부인으로 그들은 바리사이파와 그 밖의 랍비적 신심의 추종자들과 첨예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비웃으며 성경의 수혼제를 빌려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율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신명25,5-6)

    그런데 모세의 이 법은 두 형제가 같은 집에 살고 있을 때에만 적용이 되었는데,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그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외통을 걸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수혼제는 부활이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역겹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행동.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모습 안에서…, 상대방을 생각해 주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유다인들의 부활 신앙에는 부활 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현세에서의 삶과 비슷한 삶을 계속 누릴 것이라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한 삶은 우리 현세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만일 현세 생활의 고통을 그래도 갖고서 영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천국이겠습니까? 어느 영화에서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자신을 죽인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서 살겠습니까?”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천국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좀 달라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변화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세상의 인연의 고리는 모두 끊겨 지지 않겠습니까? 좌우지간 천국에서의 삶은 다르긴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일도 아닌 것을 걱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지옥에 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천국 걱정은 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두가이파 사람처럼 예수님과 논쟁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만이 영광스러운 삶에 초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탈출기 3,6).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선조들이 숭배하고 있는 그 하느님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조들이 여전히 하느님을 자신들의 하느님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죽었다면 결코 하느님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즉 그들의 육신은 이 세상에서 죽었지만 하느님을 믿고 따랐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 사람은 죽은 뒤에 가장 완전한 상을 받을 것인데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시작이니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 함입니다.

    사실 모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로마 6,4-5).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한 갈망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오직 이 지상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과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생명의 체험의 승화로서 이해될 때만이 그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그것이 믿는 이들에게 주는 기쁨의 의미가 살아나게 된다.

    그러기에 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신앙인들은 오늘도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런 부류인 것입니다. 정수기에 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 안에서 살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전 연애편지에“당신 없는 세상은 앙꼬없는 호방이요, 잉크 없는 만년필이요, 고무줄 빠진 거시기요. 모래없는 사막이니….”이렇게 썼던 것을 생각해보면서 내 안에 하느님이 안계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3. 나눔 및 묵상

    1. 부활한 후의 내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어떤 모습일까요?

    2. 내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할까요?

  4. guest 님의 말: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조금 아주 쬐끔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당신의 말씀을 모두 알아 듣지 못하지만...
    아무튼...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아니!
    부족한 저의지식으로는  성경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의 말씀을 모두 듣는다는 것이
    저의 머리로는 한계라는 생각과 감히 당신의 말씀에
    토를 단다는 것은 당신의 자녀로써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지요
    그럴 때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주님!
    모든 것이 부족한 저 헬레나는 이렇게 당신의 말씀을 당신의 마음을
    모두 알아듣지 못하지만 믿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당연히 믿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사실 제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그래도 다행이지요? 주님!
    부족하나마 제가 이만큼이라도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고 알아들으려 
    노력하는 그 마음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거지요?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말씀에 당신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으며 영생을 얻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닌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신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도다” 
    아멘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묵상하며


    ♬ Eres Tu / Mocedades


  5. guest 님의 말: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내가 사두가이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제머리속을 흔들어 놓았답니다.

    늘 아버지께 신앙을 고백하면서

    또다른 저의 내면엔

    현실에 대한 보따리가 더 크게 자리잡고 있진

    않았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죽음뒤의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가이들처럼~~

    그러면서 늘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아버지를 공격하진 않았는지를

    반성해 보았습니다.

    함께 나누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해야 했었는데

    제 주머니의 이익만을 고집하면서 현실에만

    목숨을 걸었던것 같아서 가슴이 메여왔습니다.

    그리고 내심

    “내 목숨이 다하면 그만이지 뭐~”

    라는 엄청난 생각을 했었음도 고백합니다.

    그런걸보면 사두가이나 저나 다를바가 없지요.

    그런 저를 혼내시기라도 하시듯

    아니 사두가이들의 반박에 쇠기를 박으시듯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고~

    육신의 잠듬과 동시에 다시 시작임을 모른채

    안이하게 생활하진 않았나를 생각해 봅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얼마나 깊이있게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지~~

    또한 저의 영혼의 양식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다시금 돌이켜 봅니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의 눈은 감기지 않는 것처럼

    제가 나중에 어떠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뵈올지 모르겠지만

    그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영적인 눈으로 매사에 임하면서 움직일것을

    다짐해 봅니다.

    지금의 제가 변하지 않으면 다시난다 해도

    지금과 별반 다를바가 없음을 가슴깊이 묻어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

    예수님을 옭아매려 하는 사두가이들이 반박하자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시는 말씀인지라

    시원하게 가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덜컹했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가이들의 모습이

    제모습은 아닌가 싶어서지요.

    매번 신앙고백을 하면서

    제게도 그들처럼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는지를

    깊이 반성합니다.

    육신의 죽음에 이어 영혼의 눈은 감기지 않는 것임을

    저 스스로 잊고 살진 않았는지~~

    그러기에 현실에만 연연하여 이기의 욕심보따리를 채우기에

    급급하여 등을 돌리지 않았는지요.

    아버지!

    이 부족한 딸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 모른채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끈을 쥔손에서 힘을 빼지 못했음도 반성합니다.

    힘을 뺀다하여 도망가는 것이 아닌데

    저의 부족이 헛힘을 쓰면서

    되려 중요한 것에는 힘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끝인줄로 알고 시작임을 망각한채 어리석게 살아온 저에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면서 영의 부를 채우게 하소서.

    그리하여 볼 눈의 압을 올려주시어

    멀리~ 깊이~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삶으로 드러나게 하시어

    일분일초가 헛되지 않게

    작은 것들에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소비하지 않게 은총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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