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 성인은 330년경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나 은수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고, 훗날 주교로 임명되었다.
평생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했고 많은 저서와 편지를 남겼다.
그는 동방 수도회의 아버지로 공경받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인 역시 카파도키아 인근의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바실리오 성인을 만나 함께 은수 생활을 하다 주교가 되었고,
일생 동안 정통 교리를 수호하다가 선종하였다.
말씀의 초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고백한다.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하는 이라고 말한다.
세례를 베푼 것도 예수님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답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복음).
| | | | |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1/2)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경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나 은수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고, 훗날 주교로 임명되었다. 평생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했고 많은 저서와 편지를 남겼다. 그는 동방 수도회의 아버지로 공경받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인 역시 카파도키아 인근의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바실리오 성인을 만나 함께 은수 생활을 하다 주교가 되었고, 일생 동안 정통 교리를 수호하다가 선종하였다.
말씀의 초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고백한다.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하는 이라고 말한다. 세례를 베푼 것도 예수님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답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복음).
복음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9-28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많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데이터’로 남을 비판합니다. 빈약한 자료로 이웃을 판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잘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상대가 알려진 사람이라면 더욱 심합니다. ‘잘 모른다는 말’은 여간해서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알게 된 정보이건만 내색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 자신을 낮춥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이들은 고개를 듭니다.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못 알아준다고 서운해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알이 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숙이고 싶어도 못 숙입니다. 알이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평소 단식하며 절제했던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르면 ‘한 발자국’ 물러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송구스러운 분’이 없는지요? 그런 분을 알고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1/2)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경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나 은수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고, 훗날 주교로 임명되었다. 평생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했고 많은 저서와 편지를 남겼다. 그는 동방 수도회의 아버지로 공경받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인 역시 카파도키아 인근의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바실리오 성인을 만나 함께 은수 생활을 하다 주교가 되었고, 일생 동안 정통 교리를 수호하다가 선종하였다.
말씀의 초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적’이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은 인정하면서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요한은, 그런 행동은 거짓말을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제1독서).
제1독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세례자요한처럼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노력하고 또 한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합니다
교만이 몸에 밴 탓일까요?
사실 저 보다 믿음이 깊고 겸손한 형제 자매님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는 인정하고 부럽기도 하고 본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이 드러날까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인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하면 좋을텐데 자신의 부족함을 남이 알까 두려워 숨기는 모습에
저 자신도 싫지만 아직은 자신 있게 저의 약점과 부족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직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 알량한 자존심이 저의 영생에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은...
아직까지...
남들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니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울합니다
알량한 자존심을 보물처럼 아끼고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영생을 얻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아무리 복음묵상을 열심히 하고 봉사를 한다해도
변하지 않는 저의 교만과 알량한 자존심을 버릴수 있으면
좋을텐데 보물처럼 움켜지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세례자요한처럼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면 좋을텐데...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세례자요한을 본받아
겸손한 신앙인
믿음있는 신앙인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기축년 새해를 맞이하여 올해부터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언제부터?
바로 오늘부터 복음을 묵상하는 이 순간부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묵상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1. 말씀읽기: 요한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마태 3,1-12 ; 마르 1,2-8 ; 루카 3,1-9 ; 루카 3,15-18)
2. 말씀연구
요한은 그 당시 유다인들에게 무척 권위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이들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파견되에 요한의 신원에 대해서 묻게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또한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여기서 유다인들은 공적 임무를 가진 지도층을 가리킵니다. 지도층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게 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백성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에 대해서 궁금해 했고, 걱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유다 최고의회를 구성한 단체, 곧 대제관들에게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 내용은 신앙과 결부된 공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앞에서 행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도 공적이요 신앙 고백적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혹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한을 향하여 “엘리야요?”라고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재림할 엘리야(말라키3,1.23)와 오시기로 약속된 “그 예언자”(신명18,15.18)를 구원의 시대에 등장할 메시아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고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런 인물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인데 왜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 당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엘리야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정신을 가지고 온 예수님의 사자였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니시기에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파견 받은 사람들은(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누구냐고?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한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소리”, 곧 증언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한 것은 ①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라는 것을 말하고 ② 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소리요. 즉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엘리야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엘리아요”라는 것입니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 말씀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보냈다고 전해주는 말과 대치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사가의 해설부분으로서 “파견된 자들 가운데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즉 여러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요한에게 묻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학자들로서 대제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며, 최고의회 구성원들이었습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메시아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 세례를 종말론적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위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세례자 요한은 왜 세례를 주는 지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한 증언으로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임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을 알리기 위해 수행되는 “물의 세례”일 뿐입니다.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시다”는 말씀은 요한 자신은 알고 있지만 당신들은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신적 계시를 통해 이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이 어떤 분 위로 내려와서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보거든, 그분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다(요한1,33)”라는 말씀을 이미 계시 받았기 때문입니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 앞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고 증언해야 할 예수님의 신비스런 품위를 하나의 형상어로 표현합니다. 요한에게는 다른 말이 필요 없던 것입니다. 즉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내가 비록 세례를 베풀고 있지만 별것 아니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종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말은 “종의 종”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종의 종”처럼 겸손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일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일어납니다. “당신은 누구요? 신앙인이오? 그렇다면 왜 신앙인처럼 살지 않는 것이오!”라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또 “당신은 누구요? 하느님의 천사요?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계속할 수 있단 말이오?”라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또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겸손하게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② 누가 만일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백하는 요한!
그리스도가 오심에 준비하러 온 이라고 고백합니다.
늘 묵상하는 말씀이지만 할 때마다 그의 겸손에 고개를 숙일뿐입니다.
“종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세”
강론중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제가 과연 그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봉사자가 봉사자의 심부름을 해주여야 하는 현실에서
실망하고, 힘들어 하면서 아버지께 푸념했던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 저인데 어찌 종의 종으로 살아가는 겸손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런지요.
그래도 그 사랑의 결정체인 겸손의 꽃을 피우기 위해 늘 노력하고는 있지요.
아시죠? ㅎㅎㅎ
예전에 오빠가 겸손에 대해서 알려주었습니다.
오빠가 초등학교 3학년일때…..
함께 놀다가 오디오 스피커를 구멍냈는데 오빠가 그러더군요.
“둘레야 니가 그랬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꺼야. 나랑 본이가 그랬다면 혼나니까 니가 했다고 해. 알았지?” 라고 해서 제가 그랬지요.
“왜 내가 그랬다고 해? 난 아닌데” 라고 했더니
“야, 너 우리가 혼나면 좋아?” “아니” “그러니까 니가 했다고 하라고.. 그러면 우리가 안혼나고 그냥 넘어가잖아.”
그래서 제가 “그러면 그게 뭐야? 잘하는 건가?” 라고 했더니 오빠가
“그게 겸손이야. 니가 착한 일하는 겸손” ㅎㅎㅎ
웃기죠?
제가 처음 겸손에 대해서 배운것이 그때랍니다.
허긴 따지고 보면 아주 어긋난 것은 아니지요?
아버지를 알고 그 겸손이 사랑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인 겸손도 배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까요.
전요 사랑의 결정체가 겸손과 배려라고 생각한답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겸손은 사기더라구요. 아니예요?
그리고 배려도 사랑이 없는 곳에서 나오면 짝퉁이구요.
되게 못났죠? ㅎㅎㅎ
새해부터 험한말씀 드리니…..
그래도 아버지 있잖아요~
철없던 제가 요렇게 철들은것을 보시면 신기하죠?
다 아버지 덕분이지요.
전요 요한처럼 멋진 깊은 겸손의 소유자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돌리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늘 그 자세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답니다.
아직 흉내에 불과하지만요.
아버지의 길을 준비하러 온 이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요한처럼
속죄의 날에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제물이 되어 죽는 양처럼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만큼의 깊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빚을 겁니다.
종의 종으로 살아가되 비천하고 보잘것 없는 저가 아니라
제겐 아버지께서 계시기에 더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휘파람을 불며 겸손된 종이되어 살아가렵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어제 밤새 아파 힘들어 했지만 결국엔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루를 맞이하였습니다. 아마도 제겐 없서는 안될 아버지신가봐요.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고백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줌에 바리사이들이 묻지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면 왜 세례를 주냐고~~
그러자 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시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고 고백합니다.
참 멋있습니다. 요한의 그 겸손이 제 겸손이 되기를 청해 봅니다.
“종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 에 대해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제가 봉사를 하면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했는지를 생각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아버지를 위한 제 사랑의 고백임인데 부족한 저이기에
그 이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나만’ 이라는 꼬리를 붙이면서 활짝 핀 꽃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새삼 느껴봅니다.
아버지!
제가 일어나 아버지를 찾고, 잠자리에 들면서 아버지께 인사드리기까지
언제나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의 열매들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소서.
늘 아버지를 노래하면서 열매없는 소리를 내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랑의 결정체인 겸손의 꽃을 피워 요한처럼
아버지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버지의 이름을 말함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저의 삶속에서 고개숙임으로 아버지에 대한 저의 고백을 드러내게 하소서.
늘 아버지를 찾는 이쁜 딸이 두손 모아 겸손의 꽃을 내밀며
행복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인사하게 하소서.
아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그 소리는 오시는 이의 길을 고르게 하는 말씀이란다.
세례자 요한께서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 조차 없는 분의 말씀이란다.
광야!
그곳은 풀도 없고 물도 없는 메마른 땅을 지칭하지는 않으리라.
광야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날 위한 이기심도 버리고 탐욕도 버리는
하느님의 땅이리라.
그분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의 땅이리라.
광야는 너와 나를 구별 않는 우리의 땅이리라.
목말라도 마실 물이 없고
지쳐도 피할 그늘 없는 외로운 곳이어도
맑은 기쁨이 샘솟는 하느님의 집이리라.
그 곳에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전하며 사랑하라 외쳐야 한다.
그 곳이 바로 우리가
하늘 가는 길의 쉼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