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4/19)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제자 토마스에게 발현하십니다. 그러시고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승복합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토마스의 모습이 없는지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토마스의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의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 한 번 더 발현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다. 부활은 깨달음이며 은총이다(복음).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밖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찬 토마스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못 믿겠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는 스승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살아나실 거라면 왜 죽어야 하셨는가? ‘죽음의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지나친 발언이었습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십니다. 순전히 토마스를 위한 발현입니다. 그러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 말씀에 토마스는 엎드립니다. 눈으로 확인했기에 엎드린 것은 아닙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자기를 위해 ‘한 번 더’ 나타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이론은, 사람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승복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랑과 애정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승복하게 합니다. 이후 토마스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는 결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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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4/19)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제자 토마스에게 발현하십니다. 그러시고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승복합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토마스의 모습이 없는지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토마스의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의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 한 번 더 발현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다. 부활은 깨달음이며 은총이다(복음).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밖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찬 토마스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못 믿겠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는 스승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살아나실 거라면 왜 죽어야 하셨는가? ‘죽음의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지나친 발언이었습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십니다. 순전히 토마스를 위한 발현입니다. 그러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 말씀에 토마스는 엎드립니다. 눈으로 확인했기에 엎드린 것은 아닙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자기를 위해 ‘한 번 더’ 나타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이론은, 사람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승복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랑과 애정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승복하게 합니다. 이후 토마스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는 결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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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uest 님의 말: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4/19)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제자 토마스에게 발현하십니다. 그러시고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승복합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토마스의 모습이 없는지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쳤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부활의 연장으로 재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제1독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라야 세상을 이긴 사람이다(제2독서).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5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6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나의 하느님/갓등중창단 
    
    
    
    
    

  3. guest 님의 말: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

    어제부터 주일에 독서를 하게 되어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연습을 하는데 자꾸만 한 단어가 매끄럽게
    되지 않고 버벅거려 애를 먹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되었는데 이상하게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버벅거리게 되니 많은 신자들 앞에서 실수를 하게 될까
    걱정이 되어 독서를 하지 못한다고 거절을 할 껄 하는 후회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서를 하게 되어 복음말씀은 묵상을 하느라
    매일 읽었지만 독서는 빼 먹을때도 있었는데 이번기회를 통해
    독서를 많이 읽으며 묵상까지 하게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생각도 하게 되니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음을 느낍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말씀이 저에게 하신말씀 같아 뜨금했습니다
    언제나 의심나면 묻고 따지고 대충 넘어가지 못하는 까다로운 
    저의 성격에 복음묵상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해도
    무조건 당신을 믿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은 저의 신앙이
    초보단계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수확공식은 아닌데 보여지는 것에 목숨을 걸고있는
    저의 모난성격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고쳐지지 않는 저의 성격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답게 의심하지 않으며
    당신의 말씀으로 행복하고 기쁨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답게
    세상을 이긴 사람답게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기도해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묵상하며

  4. guest 님의 말:

     

    어젠 반모임을 하고 왔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나누면서 손을 잡고 인사를 하였지만

    누구를 위한 기쁨으로 나눈 인사였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답니다.

    이상하지요?

    기쁨이 넘치는 반모임이었는데 얼마사이에 이렇게 되었네요.

    아버지께 죄송할 따름이랍니다.

    그래도 노력을 해야겠지요? 언제까지든~~

    무엇을 위한 나눔이고,

    무엇을 위한 소공동체 모임인지를 망각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토마스의 모습을 담아보기도 하였습니다.

    나와 맞는 이의 입장에서 기본을 덮어버리려는 이들의 모습에서 맘이 아팠고,

    그 외에 것을 덮어버리고 왜곡하려는 모습이 사실 무서웠습니다.

    그것은 아닌데~~

    엄청난 후회를 하고 맘 아파하면서 울땐 이미 늦을텐데

    그것을 모르는 그들이 안스러워서 내내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그들도 지금은 모르니까 그렇겠지요?

    아버지!

    토마스는 아버지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런 억지스런 말을 했을수도 있겠지요.

    “다시 오실꺼면서 왜?” 라고 할수도 있잖아요.

    너무도 사랑했으니까~~~

    단, 믿지를 않고 특별한 체험을 요구하는 저같이 무지한 사람에게

    토마스를 빗대어

    깨우치게 하심일수도 있겠지요.

    참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어렸을 적 옥수수를 따러 가서 제가 수염이 난 옥수수는 죄다 살짝 벗겨 보았답니다.

    키가 닿지 않아 지게를 딛고 올라가기도 하고

    때론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직접 해 봐야 직성이 풀렸지요.

    그러면 아버지께선 화도 안내시고 웃으시면서 왜 그러냐고 묻기만 하십니다.

    그럼 제가 아주 당당히 말합니다.

    “옷을 벗겨봐야 살이 찐건지 알지”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하시고 웃기만 하셨지요.

    그리고 엄마껜 누군가 와서 못먹게 했다고만 하신 아버지시랍니다.

    그리고 제게 그러셨지요.

    살이 쪘는지를 보기위해 다 옷을 벗기면 개네들은 죽는다고~~

    그러자 어떻게 아냐고 묻는 딸에게 그러셨습니다.

    “처음엔 만져보고 알지만 나중엔 느낌으로 안다고~~” 그땐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젠 알지요.

    성숙한 농부의 모습으로 자리잡으면서 무언가를 헛되이 바라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땀흘린 댓가에 기뻐하고 감사하신다는

    친정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가슴에서 늘 저와 함께 계심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냥 함께 호흡하는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인가 봅니다.

    제가 아버지를 믿는다 고백하지만 과연 오롯한 저의 마음이었는지를 되새기게 하는 시간이네요.

    토마스의 솔직함이 저의 모습일수도 있지요?

    차라리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셨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 마음이길 바라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 사랑에 힘입어 용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안아야 함도 되새김 해 봅니다.

    저희를 위해서 돌아가시어 부활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가슴으로 안으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오로지 아버지의 그런 크신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그 사랑에

    용서의 꽃을 피우면서 사랑을 전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오로지 사랑과 애정만이 잔재하는 아버지의 딸로서 밝게 서렵니다. 지금처럼~~

    참된 회개를 하는 이 딸을 보시고 기쁨에 넘쳐 웃으실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힘을 내어 달릴 것입니다.

    누가 뭐래든 아버지의 사랑이 제겐 가장 큰 힘이자 삶의 나침반이니까요.

     

    사랑이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임을 알려주시려 사랑을 쏟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가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겠다 하자 그리하라시는 아버지!

    그리고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그렇습니다. 정녕 제게 하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체험을 바라면서 늘 아버지를 바라본 것은 아닌지요.

    입으로는 멋지게 고백하면서 눈앞에서 어떠한 기적을 바란 것은 아닌지요.

    주심에도 늘 부족해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못난 자식은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진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아야만이 함께 있음이 아니라

    어디에 계시든 가슴으로 공유함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하시어

    아버지와의 대화속에서

    더 성숙한 모습으로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사랑속에서 이끄시는데로

    저를 맡기게 하시어 멋진 용서의 꽃을 피우면서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저가 되어 회개의 옷을 입고 기뻐뛰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멈출 줄 모르는 웃음으로 더 깊은 힘이 샘솟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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