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1. 말씀읽기:마태19,3-12 

혼인과 이혼 (마르 10,1-12 ; 루카 16,18-18)

혼인과 독신



2. 말씀연구

한참 윤회가 인기기 있었을 때(물론 없습니다), 어느 공개강좌에서 진행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습니까?” 그러자 대부분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한 충청도 여인이 다시 결혼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진행자는 “사랑하시나보죠?”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놈이 그놈이죠…”

어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놈 길들이느라고 이렇게 머리가 하얗게 변했는데 그 짓을 또 하란말여….”



살다보면 서로 싸우는 일도 있습니다. 정말 미운일도 있고, 그 때문에 내가 구속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게 되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눈에 띠게 됩니다. 살다보면 서로가 할 이야기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하지만 그 사람과 산다 하여도 또 시간이 지나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가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고 이혼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성격차이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그런데 기억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전에 내가 그렇게 좋아서 쫓아다닌 그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함정을 팠습니다.

3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모세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또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베레아에서 조강지처를 쫓아내고 그 대신 헤로디아를 얻은 안티파스 왕을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이 된다. 왕에게, 특히 헤로디아에게 혼인윤리를 회상시키기 위해 용감히 대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그 대가로 목을 내 놓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두 가지 특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①단일성과 ②혼인의 불가해소성입니다. 혼인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부부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맺어진 부부는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기 전까지는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잘못된 이혼 관습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남편은 이혼장을 쓸 수 없습니다. 만일 이혼장을 쓰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전처의 권리가 아직 성립되고 있기 때문에 전처에 대하여 간통을 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뿐 아니라 일부다처제까지도 금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도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에서는 여자에게도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풍속이 문란해짐에 따라 여자도 곧잘 이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팔레스티나의 왕실은 이 점에 대해 몹시 해로운 모범을 주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의 자매 살로메는 기원전 25년, 자기 남편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헤로디아는 필립보를 버리고 안티파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도 자주 그런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안된 문제를 이용하여 이혼장에 관한 것과 거기서 저절로 이끌려 나오는 귀결을 확실히 하시려고 합니다.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했느냐는 질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이혼을 허락했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왜 그랬을까? 신명기 24,1-4에 그 목적이 있다. 이 율법에 따라 아내에게서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남편은 그 여인을 쫓아내기 전에 이혼장을 써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이혼은 쫓겨난 여인 편에서 보면, 자기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과 재혼을 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양식입니다. 아내를 쫓아 낸 남편은 그 여인이 두 번째 남편에게 또 이혼을 당하거나 사별한 경우에도 다시금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혼장은 히브리말로 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가 쓰고 두 증인이 서명하고 처의 후견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내는 자유롭게 되고 부모가 있으면 친정에, 또 부모가 죽었을 경우는 친구 또는 친척 집으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이 적은 어린이는 아내의 손에 남겨지지만, 부양의 의무는 남편에게 있었습니다. 여섯 살 난 사내아이는 아버지와, 딸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는데, 어느 경우나 아버지에게 부양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쫓겨난 아내는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이혼의 구실이 되어 있던,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란 성서에서는 확실히 또 오직 하나 아내의 불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만일 무엇인가 아내에게 비난받을 중대한 일이 남편 쪽에 있다면 이혼을 할 권리를 잃게 되었습니다(신명22,13-19.28-29). 그리고 유배 이후의 유다인의 성서문학은 혼인을 맺으면 풀 수 없다는 데로 기울고 있습니다(말라기2,14-16;잠언31,10-31)



 랍비 샴마이는 아내의 간통만이 이혼장을 써 줄 이유라고 가르쳤습니다. 기질이 맞지 않는다던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이유 때문에 이혼할 수는 없었습니다.

랍비 요가난과 랍비 엘리아잘도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랍비 키아의 아내는 정말 기질이 거칠고 다루기 어려운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쫓아 내지 않아서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샴마이와 같은 시대 사람인 랍비 힛레루는 아내의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①결혼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다.

②남편과 말다툼을 했다.

③친척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했다.

④베일을 쓰지 않고 외출을 했다.

⑤다른 남자와 말을 했다.

⑥고기를 지나치게 태웠다.

⑦국의 소금 맛이 너무 짰다.

⑧가정의 비밀을 다른 이들에게 흘렸다.



 그리고 2세기가 되면서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더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경우 전처를 내 쫓을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무슨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혼장이 얼마나 악용되고 있는가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모세의 율법은 유다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하나의 특권이 아닙니다. 그들의 고집 센 기질, 굳어진 마음, 너그러움이 모자라기 때문에 허용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입법자인 모세로서는 이혼을 금하는 법을 마련해야 했겠지만, 히브리 민족의 타락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처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들어 이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결혼제도를 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일부일처의 헤어질 수 없는 제도를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묵어 주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고, 사람이 갈라놓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혼인의 불가해소성).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적 구조로 볼 때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음행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간음하다가 붙잡히면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작은 동네 안에서 여인들이 음행할 일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내가 음행한 경우는 거의 없으니 결국은 이혼하지 말라는 이야기 입니다. 또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혼은 안 되는 것입니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들 중에는 결혼을 한 사람들도 있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도들은 아직도 “남성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독신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독신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거니와 더 나아가 하느님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사람, 결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시도는 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지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어떤 경우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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