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교안 [한] 海西敎案

1902년 정점으로 이를 전후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천주교회와 관청 사이에서 빚어진 일련의 충돌 사건을 말한다. 교안은 이미 1886년, 즉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직후부터 발생하였다. 한불조약은 프랑스 선교사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나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에게는 아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선교사들에게 개항지(開港地)에서의 정착은 인정하였으나 기타 지방에서의 정착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지방에 정착해 있던 선교사들이 적지 않았고 뿐더러 본당의 증설로 인해 선교사의 지방진출이 잦아졌으므로 자연 지방관리와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안이 주로 지방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인에게도 종교자유가 인정된 것은 1899년의 교민조약(敎民條約)에서 비롯되었고, 선교사에게 지방에서 정착할 권리가 인정된 것은 1904년의 선교조약(宣敎條約)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교민조약에서 한국인의 종교자유가 인정되었을지라도 아직 이에 대한 계몽과 이해가 부족하였고, 특히 유교적 대중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은 척사정신(斥邪精神)과 양이(攘夷)에 대한 적대감정으로 말미암아 그 후에도 교안은 그치지 않았을 뿐더러 1901년에는 제주교난(濟州敎難)과 같은 최대의 교안마저 낳게 함으로써 교민조약을 지방적으로 재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교민조약의 채결 이후에도 일부 지방관리들이 반천주교적 행동을 계속한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즉 첫째는 중앙정부의 행정문란과 둘째는 그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은폐 또는 정당화하려 한 때문이었다. 행정의 문란과 가렴주구에 몹시 시달려오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하고자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교회에서 그 의지처를 구하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개종률이 갑자기 높아지게 되었는데, 황해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다. 물론 지방관장들은 외국인 선교사 앞에서 신자들에 대한 불의한 행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회만 있고 구실만 있으면 그들의 부정행위를 가로막는 선교사와 신자들을 괴롭히고 복수하려 하였다.

황해도는 1896년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가 파견됨으로써 선교사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빌렘 신부는 안악(安岳)의 매화동(玫化洞)에 최초의 본당을 설립한 후 이어 신천(信川)의 청계동(淸溪洞)에 제2의 본당을 세웠다. 그가 청계동으로 간 것은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의 개종동기는 종교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인 요소가 많았다. 어쨌든 그는 천주교로의 개종을 결심하고 빌렘 신부를 청계동으로 초청하여 일가친척과 주민들을 모두 천주교로 입교시켰다. 미구에 황해도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개종률을 기록하면서 선교사가 속속 파견되고 신자수가 급증하였다. 처음에 600명에 불과하던 신자수가 1902년 벌써 7,000명이 되었고, 본당수도 8개, 따라서 선교사수도 8명으로 증가되었다. 한편, 지방관장들은 일찍부터 천주교로의 개종운동을 저지하기 시작하였다. 관찰부(觀察府)에서는 1897년 교도단속훈령(敎徒團束訓令)을 통해 소위 ‘근자에 천주교도들에 의한 각종 행패가 자심하다’고 하며 신천과 안악 등 각 군에 천주교도 단속을 지시하였다. 이때 안태훈이 개종운동과 관련되어 신천군수에게 체포되었는데 빌렘 신부는 신천군수에게 항의하고 그를 석방시켰다. 이로써 빌렘 신부와 지방관장들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다음 빌렘 신부는 해주감사에게 체포된 안태훈의 동생 안태건(安泰健)을 석방시켰다. 1898년에는 안태훈 등 신자 4명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안악군수를 찾아가 항의하고 석방시켰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안의 발생은 더욱 잦아졌다. 먼저 옹진에서 김응호(金應鎬) 등 옹진교우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빌렘 신부와 김문옥(金紋玉) 신부는 서신으로 또는 직접 군수를 찾아가 항의하였고, 한편 해주관찰사는 옹진군수를 통해, 또 옹진군수는 순검과 보부상들을 통해 도리어 교우들을 죄인으로 다스렸다. 1902년 이용직(李容稙)이 신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교안을 더욱 확대되었다. 그는 반천주교의 훈령을 자주 선포하고, 천주교인을 해고시키는 등 천주교를 전멸시키려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보부상들과 특히 그 두목인 박정모(朴貞謨)를 이용하였고, 심지어 개신교도들까지 이용하여 천주교를 공격하게 하였다. 박정모는 1902년 6월 황주(黃州)의 한기근(韓基根) 신부댁을 습격하였다. 빌렘 신부가 이에 항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같은 무렵 재령(載寧)의 신환포(新換浦)와 장연(長淵)에서 처음으로 개신교도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환포에서는 교우들이 새 강당을 짓기 위해 개신교들에게까지 애긍을 강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재령의 르각(Le Gac, 郭一良) 신부는 즉시 금전을 강요하는 일을 중단시켰고, 빌렘 신부는 헌트(Hunt) 목사를 직접 만나 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개신교도들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장연에서는 교우 조병길(趙秉吉)이 김윤오(金允五)에게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김윤오는 향장(鄕長)으로 있으면서 공금을 유출한 때문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언더우드(Underwood) 목사는 빌렘 신부에게 서신을 통해 항의하였고, 빌렘 신부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2년 9월에는 은파(銀波)성당의 물건들을 도둑맞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김문옥 신부는 은파성당의 책임자였다. 끝으로 1903년 3월에 재령의 성당문을 파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상의 사건들은 소송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원고(原告)는 대개가 외교인이나 개신교도들이었다. 물론 천주교인이 원고인 적도 없지 않았으나 관장들의 천주교에 대한 적대심으로 말미암아 입장이 뒤바뀌어 결국 피고가 되고 말았다. 사건은 군에서 관찰부를 거쳐 법부(法部)나 외부(外部)에까지 상소(上訴)되었고, 한편 천주교 측에서도 선교사를 통해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보고되고 뮈텔 주교는 법국공사에게 보고함으로써 결국 외부대신과 법국공사 사이에서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이른바 교안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 개신교의 목사와 신도들이 개입됨으로써 사건은 더욱 복잡해지고, 해결도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법국공관 측에서는 교회당국과 협의한 끝에 정부측과 교회측에서 작기 현지로 조사관을 파견하기로 정부에 건의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이응익(李應翼)을 해서사핵사(海西査覈使)로 파견하였고, 교회측에서는 부주교(副主敎)인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를 조사관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사핵사 이응익과 관찰사 이용직의 천주교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 개신교 선교사들의 개입, 빌렘 신부의 조사불응과 일부 천주교 피고인들의 은닉 등으로 재판을 일방적으로 천주교에 불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그 결과가 ‘해서사핵사보’(海西査覈使報)로서 정부에 제출되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빌렘과 르각 신부의 소환과 법국공사를 통한 그들에 대한 재판이 요구되었다. 이에 대해 법국공사는 오히려 사핵사와 관찰사 등을 황해도 사건의 장본인으로 고발하고 황해도사건에 대해 재심을 요구함으로써 외부와 법국공관 사이의 대립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03년 11월 법국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가 귀국에 즈음하여 대리공사에게 해서교안을 포함한 그간의 모든 교안에 대한 일괄해결을 지시함으로써 해서교안을 위시한 그간의 모든 교안들이 일괄적으로 타결되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치적이요, 외교적인 해결이었다. 이에 따라 무엇보다도 빌렘 신부가 황해도 임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해서교안의 결과 황해도에서의 신자의 감수현상은 신자 중 3부의 1이 배교하였고, 3분의 1은 냉담하였으며, 3분의 1만이 교우로 남아있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다. 해서교안은 한불조약의 미비,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척사양이 정신, 행정의 문란, 지방관리들의 가렴주구, 교파간의 경쟁심, 일부 천주교인들의 불순한 개종동기와 강요된 개종운동, 신자들의 세속사정에 대한 빌렘 신부를 위시한 일부 선교사들의 지나친 관여 등 복잡다단한 요소와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崔奭祐)

[참고문헌] 李元淳, 朝鮮末基社會의 對西敎問題 硏究(敎案을 中心으로 한), 歷史敎育, 15, 歷史敎育硏究會 1973 / 崔鍾庫, 韓國에 있어서 宗敎自由의 法的 保障過程, 敎會史硏究, 3, 韓國敎會史硏究所, 1981 / 黃海道天主敎會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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