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활동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에 그를 시성하였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율법을 받으려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날 때 너울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신적인 광채를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탈출 34,29-35 참조). 그러나 성령을 받은 우리는 너울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의 거울은
구리로 된 것으로 오늘날과 달리 어렴풋하게 형상을 비춘다(제1독서).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인 차원에서 지킬 것을 가르치신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모욕을 하는 행위 또한 그를 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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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6/13)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활동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에 그를 시성하였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율법을 받으려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날 때 너울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신적인 광채를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탈출 34,29-35 참조). 그러나 성령을 받은 우리는 너울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의 거울은 구리로 된 것으로 오늘날과 달리 어렴풋하게 형상을 비춘다(제1독서).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인 차원에서 지킬 것을 가르치신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모욕을 하는 행위 또한 그를 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하는 행위는 살인에 버금가는 것으로 규정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했을 뿐인데, 그것을 두고 재판에 넘겨지거나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또한 불붙는 지옥에 던져진다는 말씀은 너무나 가혹하게 들립니다. 그 정도로 잘못한 대죄인가요?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하면 그가 받을 만큼의 고통을 본인이 그대로 다시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것은 그를 재판에 넘기는 정도의 고통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최고 의회에 넘길 정도의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며, ‘멍청이!’라고 하는 것은 그를 불붙는 지옥에 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상대방에게 안겨 준 고통이 그렇게 큰 것이고, 그 고통이 마치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우리 삶의 이치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고, 이러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러한 폭력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화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 원망을 품은 형제가 생각나면 먼저 그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전제로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