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한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출애 20, 8-1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공휴일 정도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어 주신 계약과 결부되어 있었다. 안식일은 특별한 모양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날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것은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해서 일곱째날 거룩히 지내라고 강조하지만 신명기 법전에서 안식일을 강조하는 내용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 “너희 주인들이 쉬어야지 종들도 쉬고, 나귀도 쉴 수 있다.” 이것은 억눌린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서라도 안식일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회정의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 안식을은 인도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단순히 사법적인 성격을 초월하여 인본주의적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극단적으로 지키기 까지 하였다. BC 171년, 안티오쿠스 4세는 안식일을 금지시키고, 토라의 소지를 금지시켰으며 안식일을 지낼 경우에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할례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에게 봉헌하였으며, 제우스 신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봉헌한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때에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강요하던 시리아 병사를 마타디아 노사제가 죽이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166년에 마타디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망치’라는 뜻)가 자유를 위한 전쟁의 지휘권을 가지고 투쟁을 한다. 이 투쟁에 즉시 참여한 사람도 많지만 회의적 자세를 가지고 회피한 계층이 더 많다. 회피한 계층 중에는 하시딤(경건주의자)집단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종교자유는 원했지만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주저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동굴에 숨어 있던 수많은 하시딤을 찾아내서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식일이었기에 이들은 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안식일 규정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쁨에 넘쳐 하느님 안에서 쉬는 날이라는 개념에서 점차 의무적인 날로 바뀌어 갔다. 그래서 복음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부자리를 가지고 옮겨다니는 것조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행동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안식일을 예수님께서 무시하였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게 된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셨더라도 박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라삐들의 의견을 보면 보통 죽을 위험에 처해진 사람이라면 안식일에라도 치휴할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음날로 미루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38년을 기다려온 사람이라면 하루쯤 더 기다렸다가 치유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고 시비를 건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다르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