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의 종말론적 사고에서 ‘나라’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형태들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이신 하느님께서 어느 날엔가 결정적으로 그리고 온 우주에 걸쳐 당신 최고 통치권을 명백히 드러내실 것이라는 기대이다. 묵시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선의 군대와 악의 군대가 최종 결전을 벌인 뒤 악마의 세력이 깡그리 분쇄된 다음 평화와 선이 영속하는 시대가 수립된다는 것이다.
공관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고,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신비는 예수님의 말씀 및 업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악마들을 추방하신 행적은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이 분쇄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임무 수행 안에 이미 현존해 있는 실재이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그 실현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공관 복음서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생각의 두 측면들, 즉, 이미 실현된 종말과 미래에 실현될 종말론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종말론에 있어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자격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배격하는 데 달려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 존재들에 의해강요를 받거나 재촉받을 수 없다. 하느님 나라는 실로 하느님께서 이룩하시는 구원의 기적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라는 표상은 제4복음서에서 그렇게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요한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 및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느님의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고, 그 어떠한 인간활동에도 매여 잇지 않다. 장엄한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리스어인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예수님의 언명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된다.
니고데모의 답변은 한심스런 오해를 드러내고 있다.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 반문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의 이중적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거나 그가 어리숙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리둥절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니고데모의 답변은 하느님께로부터 동떨어진 인간들의 상태를 극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완전히 다르고 양립할 수 없는 실재의 차원들이 여기에서 문제시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두 가지가 구별되고 건널 수 없는 이해 방식들, 즉 육적인 이해 방식과 영적인 이해 방식이 문제시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 육(그리스어로 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이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존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이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한다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는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킨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집음이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