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리고


내 영이 내 구원자 하느님을 반겨 신명났거니,


정녕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도다.


보라, 이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권능 떨치는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도다. 그분의 이름 거룩하여라.


그분의 자비는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로다.


그분이 당신 팔로 힘을 행사하시어 그 심사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부리는 자들은 권좌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은 들어올리셨으며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


그분이 자비를 기억하시어 정녕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도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미치리로다).“




마리아의 노래는 실제로 마리아 자신이 읊은 것이 아니라 루가복음 집필에 앞서 유행한 시가라는 것이 신양 학계의 통설입니다.


이는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에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부르던 노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흝어보면 민족 분열 현상이 잦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특권을 누린 지배층과 그렇지 못한 피지배층으로 양분되었습니다. 피지배층은 어느 모로 보나 못난이들이요 말없는 민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날 때마다 선정을 기대했지만 언제나 다가오는 것은 폭정이었습니다. 이승의 정치에 환멸을 느낀 소외자들은 오직 하느님 친히 다스릴 때를 학수고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하느님 친히 선정을 베푸실 것이며 그 때가 되면 오늘의 잘난 자들과 못난 자들의 위치는 한 순간에 뒤바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인 신앙은 주로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가 끝난 다음부터 차츰차츰 싹트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로 말미암아 이른바 빈자의 영성이 생겼습니다. 이제 “가난한 이들”은 그냥 못난 군중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하는 무리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종말에 구원받을 “남은 이들”로 자처했던 것입니다.


구가는 사도 2,43-47;4,31-37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서술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가난한 이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히해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는 대목들을 훑어보아도(갈라2,10;1고린16,1;2고린8-9장;로마15,25-26)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정치⋅결제⋅문화적으로는 못난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신앙심만은 독실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찬양할 때는 찬양시나 감사시를 읊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본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구원(예수님 사건)을 기린 노래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사실 이 노래에서는 인간을 잘난 자들과 못난 자들로 대별하는데, 잘난 자들은 비록 권세있고 부유하지만 교만한 자들이며, 반대로 못난 이들은 비록 비천하고 배고프지만 하느님을 두리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느님께서 잘난 자들을 물리치시고 그 대신 못난 자들을 거두신 일을 두고 감사의 노래를 읊조립니다.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지중해 여러 교회에 보급시켰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루가는 이를 채집하여 마리아의 입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이 노래는 전편(46-50절)과 후편(51-55절)으로 양분되는데, 전편을 개인 감사시라 한다면 후편은 집단 감사시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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