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 받았다.


  만일 내가 아주 어려운 병에 걸려 있다면 그래서 나를 고쳐 주실 분이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면…,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중병에 걸려 있는데 고칠 방법이 전혀 없고 오로지 한 사람만이 고칠 수 있다면 어찌할까?



분명 달려 갈 것이다. 아무리 먼 길이라 할지라도 아픈 몸을 이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이 병 중에 있다면, 그래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아주 멀리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업고라도 달려 갈 것이다.




오늘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침대에 누인 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그들은 그 중풍병자를 사랑했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를 일으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힘내시오, 아들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소”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써 용서를 베푸시는 것 보다 율법상 또는 윤리상 죄인으로 판명 받은 세리나 창녀들이나 기타 죄인들과 서슴없이 가까이 지내고 식사하고 변호함으로써 그들을 거두어 들이셨다. 즉 행동으로 사죄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병과 죄가 직접적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고가 개인적인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율법학자들의 의견을 단호히 배척하셨다. 그러나 이 사람은 두 가지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즉 쇠약한 육체의 병과 내부로부터 그를 파멸시키고 있는 죄의 병이다. 죄의 병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의사도 다룰 수가 없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셨다.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 받았다.


중풍병자는 구원을 얻었다. 얼마나 기뻤을까? 그리고 그를 침상에 뉘여서 들고 간 동료들은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율법학자들이었다.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겉으로만 볼 때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누가 감히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처럼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죄라는 것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고의로 어기는 것이기에 오직 하느님만이 재판관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아셨다.


“어찌하여 당신들의 마음속에 악한 속셈을 품습니까? 사실 어느 편이 더 쉽겠습니까?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혹은 ‘일어나 걸어가라’ 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신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병을 고치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훨씬 쉬운 일도 할 수 없으면서 훨씬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그들이 예수님께서 외적인 병들을 없애 주시는 것을 직접 명확하게 보았다면 그것은 예수님게서 내적인 병도 제거하실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당신들이 알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그분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그대의 침대를 들고 집으로 가시오.”




갑자기 요즘 나오는 광고가 하나 생각난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이것은 히딩크가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의심에 차서 던진 말이 아니다. 이것은 중풍병자를 침상에 뉘어서 들고 온 사람들의 마음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으면 좋겠다. “그래 네가  할 수 있으면 해봐라. 그대신 못하면 알지?” 이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 예수님! 한번 하실 수 있으면 해보쇼.” 이것이 아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 뜻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병자는 벌떡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에서 강조되는 것은 병자가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받으셨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권한이 사도들에게도 주어져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가 고해소에서 죄를 사함 받을 때마다 이러한 기적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교회에 위임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죄의 사함을 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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