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이단, 몬타니즘
(Heretical Christian Movement on the Primitive Church, Montanism)
몬타니즘(Montanism)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반에 프리지아에서 융성했던 이단적 운동입니다. 프리지아는 전통적으로 키벨레(Cybele)와 배우자 아티스(Attis)를 매우 도발적이고 흥분된 춤으로 섬기는 신비주의적 밀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리하여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프리기아의 이단’으로 불려졌습니다.
몬타니즘은 그 창시자인 몬타누스(Montanus)에 의해 일파를 형성했습니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이전에 동방의 풍요의 여신 키벨레를 믿는 밀교의 사제였습니다. 에피파니우스(156)와 유세비우스(172)에 따르면 그는 처음 프리지아(Phrygia)에 있는 작은 마을인 아르다바우(Ardabau)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 한 영에 사로잡혀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목소리를 자처하고는 신약에서 나타나는 성령강림의 때가 찼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로 신성화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인 자기들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에피파니우스에 의하면 몬타누스는 “나는 천사도 하느님의 사자도 아니다. 나는 강림한 주 하느님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종교의식은 페푸자(Pepuza)에 있는 교당에서 자주 열렸는데 횃불을 들고 흰 옷을 입은 일곱 명의 회중들에게 그들의 신탁을 전달하기 위해 들어가 참석자들의 참회를 눈물로 촉구하고 광신적 행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Paraclete)가 몬타누스프리스카(Prisca 또는 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라는 두 명의 여인을 예언자로 삼아 교회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엑스터스(황홀경)의 상태에서 예언(ecstatic prophecy)하고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요한묵시록 21장에 예언된 새예루살렘이 페푸자(Pepuza)라는 페루지아인의 작은 마을에 곧 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종말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있던 몬타누스는 크리스챤들을 정화(purify)하기 위해 엄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육체적 욕망을 제거하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의 주장들은 지금도 여러 이단들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신천지도 이 이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금욕주의는 결혼을 포기할 것(후에 한 번의 결혼은 허락함), 재혼 금지, 고된 금식, 동정성의 강조, 순교에의 열망, 속죄를 위한 엄중하고 많은 참회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주류 교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고 몬타누스와 몬타니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117년경 황제 유스티니안 1세의 엄중한 법령으로 파문되었으나 서쪽에 일부가 잔존하였습니다. 그러나 몬타니즘이 끼친 영향은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of Carthage)가 AD 208년 이후 이 일파로 개종할 정도로 매력을 주었습니다.
기원 후 210년 이전 테르툴리아누스는 정통교회를 떠나 당시 소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퍼져 있던 몬타누스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예언분파운동에 가담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의 게으른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외치면서 엄격한 도덕생활을 강조한 몬타누스주의의 교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생활 방식에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몬타누스주의라는 이 새로운 운동의 대변자가 되어 이 운동을 옹호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몬타누스주의자들조차도 그가 만족할 만큼 엄격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그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분파를 세웠는데, 이 분파는 5세기까지 아프리카에 존속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고 합니니다. 그의 마지막 저서들은 220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죽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도교도들은 그가 몬타누스주의로 배교(이전의 신앙을 배척함)한 일을 용서하지 않았고, 후대의 그리스도교 저자들도 가끔씩 그를 언급했으나 매우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의 문학적 재능과 예리한 지성을 인정했습니다.
정교한 이론과 사색적 신비주의의 경향이 있는 영지주의 집단과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몬타누스의 가르침은 정통 기독교 안에서 예언활동을 통하여 영적 부흥을 일으키려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교회도 예언자의 은사활동을 인정했었습니다. 그러나 몬타누스의 예언활동은 성령의 이끄심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그들처럼 열광적인 황홀경으로 몰고 가지 않으며 권위적으로 말하지 않고 마치 성령의 목소리를 내는 양하지도 않습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엑스타시, 계시, 예언을 강조했기 때문에 묵시록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묵시록의 내용을 알았더라면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열광적인 흥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어 일상 삶 안에서 믿음을 살아가며 순교까지도 받아 들이는 것이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몬타니즘은 당시 진원지에서는 이단적인 사상으로 정죄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정통적이고 순수한 성령운동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근래에 오순절(pentecostal)운동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적으로 몬타니즘은 그 자체의 극단적이고 급진적이며 열광주의적인 모습으로 교회에서 벗어났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면서 해이해진 당시의 신앙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3세기 이후에 와서 교회의 문헌 안에서 몬타니즘의 영향은 급격히 줄었고 아주 드물게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7세기에 이르러 몬타니즘은 더 이상 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 몬타니즘
(Heretical Christian Movement on the Primitive Church, Montanism)
몬타니즘(Montanism)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반에 프리지아에서 융성했던 이단적 운동입니다. 프리지아는 전통적으로 키벨레(Cybele)와 배우자 아티스(Attis)를 매우 도발적이고 흥분된 춤으로 섬기는 신비주의적 밀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리하여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프리기아의 이단’으로 불려졌습니다.
몬타니즘은 그 창시자인 몬타누스(Montanus)에 의해 일파를 형성했습니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이전에 동방의 풍요의 여신 키벨레를 믿는 밀교의 사제였습니다. 에피파니우스(156)와 유세비우스(172)에 따르면 그는 처음 프리지아(Phrygia)에 있는 작은 마을인 아르다바우(Ardabau)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황홀경에 빠져 한 영에 사로잡혀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목소리를 자처하고는 신약에서 나타나는 성령강림의 때가 찼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로 신성화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인 자기들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에피파니우스에 의하면 몬타누스는 “나는 천사도 하느님의 사자도 아니다. 나는 강림한 주 하느님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종교의식은 페푸자(Pepuza)에 있는 교당에서 자주 열렸는데 횃불을 들고 흰 옷을 입은 일곱 명의 회중들에게 그들의 신탁을 전달하기 위해 들어가 참석자들의 참회를 눈물로 촉구하고 광신적 행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Paraclete)가 몬타누스프리스카(Prisca 또는 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라는 두 명의 여인을 예언자로 삼아 교회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엑스터스(황홀경)의 상태에서 예언(ecstatic prophecy)하고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요한묵시록 21장에 예언된 새예루살렘이 페푸자(Pepuza)라는 페루지아인의 작은 마을에 곧 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종말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있던 몬타누스는 크리스챤들을 정화(purify)하기 위해 엄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육체적 욕망을 제거하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의 주장들은 지금도 여러 이단들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신천지도 이 이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금욕주의는 결혼을 포기할 것(후에 한 번의 결혼은 허락함), 재혼 금지, 고된 금식, 동정성의 강조, 순교에의 열망, 속죄를 위한 엄중하고 많은 참회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주류 교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고 몬타누스와 몬타니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117년경 황제 유스티니안 1세의 엄중한 법령으로 파문되었으나 서쪽에 일부가 잔존하였습니다. 그러나 몬타니즘이 끼친 영향은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of Carthage)가 AD 208년 이후 이 일파로 개종할 정도로 매력을 주었습니다.
기원 후 210년 이전 테르툴리아누스는 정통교회를 떠나 당시 소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퍼져 있던 몬타누스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예언분파운동에 가담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의 게으른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외치면서 엄격한 도덕생활을 강조한 몬타누스주의의 교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생활 방식에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몬타누스주의라는 이 새로운 운동의 대변자가 되어 이 운동을 옹호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몬타누스주의자들조차도 그가 만족할 만큼 엄격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그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분파를 세웠는데, 이 분파는 5세기까지 아프리카에 존속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고 합니니다. 그의 마지막 저서들은 220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죽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도교도들은 그가 몬타누스주의로 배교(이전의 신앙을 배척함)한 일을 용서하지 않았고, 후대의 그리스도교 저자들도 가끔씩 그를 언급했으나 매우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의 문학적 재능과 예리한 지성을 인정했습니다.
정교한 이론과 사색적 신비주의의 경향이 있는 영지주의 집단과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몬타누스의 가르침은 정통 기독교 안에서 예언활동을 통하여 영적 부흥을 일으키려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교회도 예언자의 은사활동을 인정했었습니다. 그러나 몬타누스의 예언활동은 성령의 이끄심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그들처럼 열광적인 황홀경으로 몰고 가지 않으며 권위적으로 말하지 않고 마치 성령의 목소리를 내는 양하지도 않습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엑스타시, 계시, 예언을 강조했기 때문에 묵시록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묵시록의 내용을 알았더라면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열광적인 흥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어 일상 삶 안에서 믿음을 살아가며 순교까지도 받아 들이는 것이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몬타니즘은 당시 진원지에서는 이단적인 사상으로 정죄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정통적이고 순수한 성령운동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근래에 오순절(pentecostal)운동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적으로 몬타니즘은 그 자체의 극단적이고 급진적이며 열광주의적인 모습으로 교회에서 벗어났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면서 해이해진 당시의 신앙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3세기 이후에 와서 교회의 문헌 안에서 몬타니즘의 영향은 급격히 줄었고 아주 드물게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7세기에 이르러 몬타니즘은 더 이상 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