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말씀연구>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우리에게”가 아니라 “저 사람들에게”라는 말이 쓰인 것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들을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이 아닌 일종의 암호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마음을 무디게 갖으며 신앙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터놓고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로 감춰 말씀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11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우리는 신비에 대해 듣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즉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인간을 압도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오직 기꺼이 듣는 사람만이 이해하고 아는 신비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초대하시고 한 사람도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향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이 받아들여지거나 배척을 받거나 혹은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거나 아니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죽거나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유형의 토양에 달려 있습니다.


똑같이 주어지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의 가치를 몰라서 버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사용하지 않고 창고 깊은 곳에 쌓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의 가치를 알고서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똑같이 주어졌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는 각각 다릅니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못 가진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셨지만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눈과 귀를 열지 않았기에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이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돈이 돈을 번다고 말을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투자를 해서 더 많은 돈을 법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요, 보아도 본 것이 아닙니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말해 준다 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더 알아듣기 쉽도록. 그들의 삶과 연관된 것으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 문제는 듣는 청중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들어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보아도 보려고 하지 않는 청중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알아들으려 노력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고, 그래서 누군가가 물어보면 회피하는 모습. 모임에서 오늘의 말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때, 아무 말 못하는 이유도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어렵게 느껴지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의 맛을 들인 사람들은 더욱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나눔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14  이사야가 일찌기,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하느님의 사랑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뜻에만 관심 있는 완고한 백성들. 고집이 강한 백성을 길들이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이사야 6,9-10).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라고 하느님께로부터 직접적인 명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은 목이 뻣뻣하고 한 번도 진정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았으며, 계약의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파멸은 마음을 무디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무딘 마음은 듣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치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구원의 계획 새롭게 선포하시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으며,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으십니다. 모든 이를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서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판결이 내려집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기회를 놓쳐 버렸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비유 속에 베일로 가려져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군중들과는 대조적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보고 듣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단순히 시청각적인 것이고 둘째는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려고 했고, 제자들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 예수님 자체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은 시메온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소원은 예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분을 내 눈으로 직접 뵈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그분 앞에 서게 될 때 나는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많은 군중들은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뵙고도 그것이 기쁨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발견하고 이 말씀들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들, 보고 깨달은 사람들,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이것은 세상의 근본적인 신비로서, 일찍이 감춰져 있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다(골로사이 1,24절 이하).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군중들의 완고함이 죄가 된다면 예수님을 알아 뵙고 있는 제자들의 그 이해는 공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분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2. 오늘 이 말씀이 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말씀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글은 카테고리: 지난 묵상 보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