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성론 單性論 Monophysitismus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논쟁은 3세기의 교회를 매우 동요시켰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단지 하느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은가?(Arianismus)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현현에 지나지 않은가?(Modalismus) 325년에 개최되었던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ꡒ그리스도는 천주로부터 나신 천주이시고,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성부와 일체를 이루신다ꡓ고 가르쳤다.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는 하느님께서는 마치 성전 안에 거처하시듯이 예수 안에 거처하신다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에 위치하던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에우티케스(Eutyches)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실제로는 신성 하나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예수의 인성이 의문시되었고, 동시에 예수의 구원 업적과 교회의 구원 신비도 의문시되었다. 그래서 에우티케스의 주장은 단성론 –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하나의 본성 –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시노드를 개최하여 에우티케스를 단죄하였다. 왜냐하면 에우티케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우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9년 에페소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혼란을 틈타 에우티케스를 복권시켰다. 교황 레오 1세는 이 공의회를 ꡐ강도 공의회ꡑ- 교황이 파견한 특사에게는 발언권도 주지 않았다 – 라고 규정하였다.
그 이전에 에우티케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교황 레오 1세에게 제소한 바 있었다. 교황 레오 1세는 한 서한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은 그리스도의 하나의 위격 안에서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으면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었다. 교황의 이러한 분명한 태도 표명은 서구의 신학으로 하여금 신학적 발전을 위한 방향을 설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비잔틴 교회의 경우 단성론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기까지 하였다. 다수의 동로마 황제들은 단성론으로 기울어졌고, 단성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은 단일 유출설 또는 단일 의지론의 문제로 확대되면서 교회를 위해 결코 유익하지 못한 결과들을 파생시켰다.

■ 단성론 單性論 Monophysitismus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논쟁은 3세기의 교회를 매우 동요시켰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단지 하느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은가?(Arianismus)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현현에 지나지 않은가?(Modalismus) 325년에 개최되었던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ꡒ그리스도는 천주로부터 나신 천주이시고,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성부와 일체를 이루신다ꡓ고 가르쳤다.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는 하느님께서는 마치 성전 안에 거처하시듯이 예수 안에 거처하신다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에 위치하던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에우티케스(Eutyches)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실제로는 신성 하나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예수의 인성이 의문시되었고, 동시에 예수의 구원 업적과 교회의 구원 신비도 의문시되었다. 그래서 에우티케스의 주장은 단성론 –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하나의 본성 –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시노드를 개최하여 에우티케스를 단죄하였다. 왜냐하면 에우티케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우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9년 에페소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혼란을 틈타 에우티케스를 복권시켰다. 교황 레오 1세는 이 공의회를 ꡐ강도 공의회ꡑ- 교황이 파견한 특사에게는 발언권도 주지 않았다 – 라고 규정하였다.
그 이전에 에우티케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교황 레오 1세에게 제소한 바 있었다. 교황 레오 1세는 한 서한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은 그리스도의 하나의 위격 안에서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으면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었다. 교황의 이러한 분명한 태도 표명은 서구의 신학으로 하여금 신학적 발전을 위한 방향을 설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비잔틴 교회의 경우 단성론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기까지 하였다. 다수의 동로마 황제들은 단성론으로 기울어졌고, 단성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은 단일 유출설 또는 단일 의지론의 문제로 확대되면서 교회를 위해 결코 유익하지 못한 결과들을 파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