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닾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닾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내 마음에 맞는 사람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피폐한 삶이 펼쳐질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무자비한 빚쟁이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끊임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이에게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처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 한번의 용서도 힘들때가 많은데… 무조건 용서하라니요? 말이 됩니까? 하지만,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가 부재하는 곳엔 “미음과 증오”가 잉태함을 망각하지 않게 하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아니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해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항상 저와 함께 하소서! 아멘.
헬레나: 어제는 복음묵상을 하다 너무나 힘들고 피곤해 만사제쳐놓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자면서도 복음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나니 잠을 잤는지 밤새 복음묵상을 했는지 헷갈리네요 아침에 생각나는대로 적고보니 자매님과 같은 시간에 참 신기하네요 이런일도 있고…큰병에 걸린것같기도 하고 … 좋은 하루 되세요 [08/14-07:26]
세상을 살다보면 내 마음에 맞는 사람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피폐한 삶이 펼쳐질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무자비한 빚쟁이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끊임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이에게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처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 한번의 용서도 힘들때가 많은데… 무조건 용서하라니요? 말이 됩니까? 하지만,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가 부재하는 곳엔 “미음과 증오”가 잉태함을 망각하지 않게 하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아니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해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항상 저와 함께 하소서! 아멘.
헬레나: 어제는 복음묵상을 하다 너무나 힘들고 피곤해 만사제쳐놓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자면서도 복음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나니 잠을 잤는지 밤새 복음묵상을 했는지 헷갈리네요 아침에 생각나는대로 적고보니 자매님과 같은 시간에 참 신기하네요 이런일도 있고…큰병에 걸린것같기도 하고 … 좋은 하루 되세요 [08/14-07: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한한 용서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며 남의 잘못을 용서 해줄때 하느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서도 과연 나에게 잘못한 형제자매를 용서할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용서가 없는 곳에는 미움과 증오와 죽음만이 있다는데…. 솔직히 저에게 상처를 주며 가슴아프게 하는 형제자매를 용서힐수 있는 사랑이 저에게는 없음을 제 자신이 잘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쉽게 할수 있어도 마음으로 진정 우러나는 용서를 한다는 것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자신의 성품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용서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으면서 주위의 이목과 체면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착한척 하는 사람들이 더 밉기도 하니 저의 마음속에는 하느님께서 저를 만드실 때 사랑을 빼놓으신 것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솔직한 사람이 되고싶은 마음입니다 가식적으로 하는 말에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하는데 사랑을 베풀며 용서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8)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성서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저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다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드니 그래도 저의 심성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에 오늘복음말씀은 저에게 큰 보속으로 생각됩니다 성사를 보지않았는데도 복음묵상을 하면서 고백성사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동안의 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왔는지 생각이 듭니다
.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성서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께서 그동안의 제가 지은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좋은 하루 되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루실라: 제가 아는 자매님은 솔직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실때 특별히 사랑을 많이 넣으신 것 같던데요. 멋진 하루! 아시죠? [08/14-07:2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한한 용서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며 남의 잘못을 용서 해줄때 하느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서도 과연 나에게 잘못한 형제자매를 용서할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용서가 없는 곳에는 미움과 증오와 죽음만이 있다는데…. 솔직히 저에게 상처를 주며 가슴아프게 하는 형제자매를 용서힐수 있는 사랑이 저에게는 없음을 제 자신이 잘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쉽게 할수 있어도 마음으로 진정 우러나는 용서를 한다는 것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자신의 성품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용서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으면서 주위의 이목과 체면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착한척 하는 사람들이 더 밉기도 하니 저의 마음속에는 하느님께서 저를 만드실 때 사랑을 빼놓으신 것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솔직한 사람이 되고싶은 마음입니다 가식적으로 하는 말에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하는데 사랑을 베풀며 용서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8)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성서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저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다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드니 그래도 저의 심성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에 오늘복음말씀은 저에게 큰 보속으로 생각됩니다 성사를 보지않았는데도 복음묵상을 하면서 고백성사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동안의 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왔는지 생각이 듭니다
.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성서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께서 그동안의 제가 지은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좋은 하루 되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루실라: 제가 아는 자매님은 솔직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실때 특별히 사랑을 많이 넣으신 것 같던데요. 멋진 하루! 아시죠? [08/14-07:29]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지 곰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한번도 아닌 그것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용서할 수 있는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고 또 해봐도….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닌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죽었다 또 깨어나도 저 같은 사람은 못 할 것이라고…..
그런데요 주님! 아무리 생각을 해 보고 또 해봐도 얻은 결론이 저는 용서라는 것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음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요? 오늘복음에서 당신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하신말씀에 가슴이 뜨끔함을 느끼니 저에게도 최소함의 양심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저도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용서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옹졸한 생각을 깨우쳐주시어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본받아 저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주며 사랑해주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지은 모든 잘못도 용서해주신 당신의 사랑을 깨달아 저도 당신처럼 당신의 자녀답게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자비를 깨달아 … 당신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참 뜻을 되새기며 용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으며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를 불러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지 곰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한번도 아닌 그것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용서할 수 있는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고 또 해봐도….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닌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죽었다 또 깨어나도 저 같은 사람은 못 할 것이라고…..
그런데요 주님! 아무리 생각을 해 보고 또 해봐도 얻은 결론이 저는 용서라는 것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음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요? 오늘복음에서 당신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하신말씀에 가슴이 뜨끔함을 느끼니 저에게도 최소함의 양심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저도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용서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옹졸한 생각을 깨우쳐주시어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본받아 저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주며 사랑해주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지은 모든 잘못도 용서해주신 당신의 사랑을 깨달아 저도 당신처럼 당신의 자녀답게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자비를 깨달아 … 당신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참 뜻을 되새기며 용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으며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를 불러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용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20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의 의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베드로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삐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2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3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거액은 비유의 청중에게 근동의 대제국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왕들을 연상시킵니다. (1데나리온 하루품삯: 3만원,1달란트: 1000데나리온)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4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25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6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7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고 호통을 쳤다. 28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29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30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그들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1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2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3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왕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4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엄과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지 않을 때 이 비유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종 왕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 왕은 군림만 하는 왕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이시고, 악한 종을 형리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바라봅시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용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20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의 의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베드로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삐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2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3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거액은 비유의 청중에게 근동의 대제국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왕들을 연상시킵니다. (1데나리온 하루품삯: 3만원,1달란트: 1000데나리온)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4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25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6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7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고 호통을 쳤다. 28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29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30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그들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1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2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3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왕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4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엄과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지 않을 때 이 비유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종 왕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 왕은 군림만 하는 왕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이시고, 악한 종을 형리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바라봅시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 알렐루야. ○ 활짝 갠 얼굴빛을 종에게 보이시고, 당신의 규정을 제게 가르치소서. ◎ 알렐루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닾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주님~~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나만이 아닌 모두를,내 욕심만이 아니고 모두를 위해 기도 할 수 있게 하소서!!
† 주님~~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나만이 아닌 모두를,내 욕심만이 아니고 모두를 위해 기도 할 수 있게 하소서!!
오소서. 성령이여!
세상을 살다보면 내 마음에 맞는 사람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피폐한 삶이 펼쳐질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무자비한 빚쟁이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끊임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이에게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처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 한번의 용서도 힘들때가 많은데…
무조건 용서하라니요? 말이 됩니까?
하지만,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가 부재하는 곳엔 “미음과 증오”가 잉태함을
망각하지 않게 하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아니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해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항상 저와 함께 하소서! 아멘.
헬레나: 어제는 복음묵상을 하다 너무나 힘들고 피곤해 만사제쳐놓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자면서도 복음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나니 잠을 잤는지 밤새 복음묵상을 했는지 헷갈리네요 아침에 생각나는대로 적고보니 자매님과 같은 시간에 참 신기하네요 이런일도 있고…큰병에 걸린것같기도 하고 … 좋은 하루 되세요 [08/14-07:26]
(김정만 1집 중 “용서”)
오소서. 성령이여!
세상을 살다보면 내 마음에 맞는 사람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피폐한 삶이 펼쳐질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무자비한 빚쟁이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끊임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이에게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처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 한번의 용서도 힘들때가 많은데…
무조건 용서하라니요? 말이 됩니까?
하지만,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가 부재하는 곳엔 “미음과 증오”가 잉태함을
망각하지 않게 하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아니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해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항상 저와 함께 하소서! 아멘.
헬레나: 어제는 복음묵상을 하다 너무나 힘들고 피곤해 만사제쳐놓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자면서도 복음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나니 잠을 잤는지 밤새 복음묵상을 했는지 헷갈리네요 아침에 생각나는대로 적고보니 자매님과 같은 시간에 참 신기하네요 이런일도 있고…큰병에 걸린것같기도 하고 … 좋은 하루 되세요 [08/14-07:26]
(김정만 1집 중 “용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한한 용서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며 남의 잘못을 용서 해줄때 하느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서도
과연 나에게 잘못한 형제자매를 용서할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용서가 없는 곳에는 미움과 증오와 죽음만이 있다는데….
솔직히 저에게 상처를 주며 가슴아프게 하는 형제자매를
용서힐수 있는 사랑이 저에게는 없음을 제 자신이 잘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쉽게 할수 있어도 마음으로 진정 우러나는 용서를
한다는 것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자신의 성품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용서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으면서 주위의
이목과 체면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착한척 하는 사람들이
더 밉기도 하니 저의 마음속에는 하느님께서 저를 만드실 때
사랑을 빼놓으신 것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솔직한 사람이 되고싶은 마음입니다
가식적으로 하는 말에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하는데
사랑을 베풀며 용서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8)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성서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저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다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드니 그래도 저의 심성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에 오늘복음말씀은 저에게 큰 보속으로 생각됩니다
성사를 보지않았는데도 복음묵상을 하면서 고백성사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동안의 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왔는지 생각이 듭니다
.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성서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께서 그동안의 제가 지은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좋은 하루 되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한한 용서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며 남의 잘못을 용서 해줄때 하느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서도
과연 나에게 잘못한 형제자매를 용서할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용서가 없는 곳에는 미움과 증오와 죽음만이 있다는데….
솔직히 저에게 상처를 주며 가슴아프게 하는 형제자매를
용서힐수 있는 사랑이 저에게는 없음을 제 자신이 잘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쉽게 할수 있어도 마음으로 진정 우러나는 용서를
한다는 것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자신의 성품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용서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으면서 주위의
이목과 체면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착한척 하는 사람들이
더 밉기도 하니 저의 마음속에는 하느님께서 저를 만드실 때
사랑을 빼놓으신 것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솔직한 사람이 되고싶은 마음입니다
가식적으로 하는 말에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하는데
사랑을 베풀며 용서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8)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성서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저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다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드니 그래도 저의 심성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에 오늘복음말씀은 저에게 큰 보속으로 생각됩니다
성사를 보지않았는데도 복음묵상을 하면서 고백성사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동안의 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왔는지 생각이 듭니다
.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성서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께서 그동안의 제가 지은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좋은 하루 되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제가 어떠한 잘못을 하더라도 스스로 깨닫고 늬우칠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때로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 포기하고 싶을텐데 그분께서는
저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지켜 주십니다.
나의 주님…나의 하느님… 바로 당신입니다…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느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받으려 할뿐 그 받은
사랑의 십일조조차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그토록 갈망하면서 정작 제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메마른 마음을 보여 주게 되네요.
저희를 진정으로 용서하러 오신 주님.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렇듯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원수라 여겨지는
사람들은 없을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 마음이 저희 마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제가 어떠한 잘못을 하더라도 스스로 깨닫고 늬우칠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때로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 포기하고 싶을텐데 그분께서는
저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지켜 주십니다.
나의 주님…나의 하느님… 바로 당신입니다…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느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받으려 할뿐 그 받은
사랑의 십일조조차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그토록 갈망하면서 정작 제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메마른 마음을 보여 주게 되네요.
저희를 진정으로 용서하러 오신 주님.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렇듯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원수라 여겨지는
사람들은 없을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 마음이 저희 마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지
곰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한번도 아닌 그것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용서할 수 있는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고 또 해봐도….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닌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죽었다 또 깨어나도 저 같은 사람은 못 할 것이라고…..
그런데요 주님!
아무리 생각을 해 보고 또 해봐도 얻은 결론이 저는 용서라는
것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음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요?
오늘복음에서 당신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하신말씀에 가슴이 뜨끔함을
느끼니 저에게도 최소함의 양심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저도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용서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옹졸한 생각을 깨우쳐주시어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본받아
저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주며 사랑해주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지은 모든 잘못도 용서해주신 당신의 사랑을 깨달아
저도 당신처럼 당신의 자녀답게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자비를 깨달아 …
당신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참 뜻을 되새기며
용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으며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를 불러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묵상하며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지
곰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한번도 아닌 그것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용서할 수 있는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고 또 해봐도….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닌 일곱 번씩 일흔 번은…..
죽었다 또 깨어나도 저 같은 사람은 못 할 것이라고…..
그런데요 주님!
아무리 생각을 해 보고 또 해봐도 얻은 결론이 저는 용서라는
것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음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요?
오늘복음에서 당신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하신말씀에 가슴이 뜨끔함을
느끼니 저에게도 최소함의 양심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저도 저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용서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옹졸한 생각을 깨우쳐주시어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본받아
저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주며 사랑해주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지은 모든 잘못도 용서해주신 당신의 사랑을 깨달아
저도 당신처럼 당신의 자녀답게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자비를 깨달아 …
당신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참 뜻을 되새기며
용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으며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를 불러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묵상하며
용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20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의 의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베드로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삐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2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3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거액은 비유의 청중에게 근동의 대제국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왕들을 연상시킵니다. (1데나리온 하루품삯: 3만원,1달란트: 1000데나리온)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4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25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6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7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고 호통을 쳤다. 28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29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30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그들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1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2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3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왕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4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엄과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지 않을 때 이 비유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종 왕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 왕은 군림만 하는 왕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이시고, 악한 종을 형리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바라봅시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용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20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의 의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베드로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삐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2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3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거액은 비유의 청중에게 근동의 대제국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왕들을 연상시킵니다. (1데나리온 하루품삯: 3만원,1달란트: 1000데나리온)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4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25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6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7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고 호통을 쳤다. 28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29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30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그들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1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2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3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왕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4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엄과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지 않을 때 이 비유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종 왕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 왕은 군림만 하는 왕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이시고, 악한 종을 형리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바라봅시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