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לꔞוֹי)
― Hans Walter Wolff, “Introduction of Joel”, in JOEl and AMOS ―
1. 정경 안에서 책의 위치
2. 요엘의 시대
3. 요엘서
4. 요엘의 언어
5. 요엘의 메시지
* 번역을 마치며…
* 학문적 논쟁점
1. 정경 안에서 책의 위치
해석자들은 한 때 정경에서 요엘1)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근거해서 요엘을 초기의 예언서들과 연관을 짓는 경향을 보였다. 이 관점은 연대기적 기준들이 12 예언서들의 배치에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각각의 예언서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요엘의 서두(1,1)는 12 예언서들의 집성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어떠한 시기적 언급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모스 이전 시대에 그 책이 기원을 갖는다는 것을 그 당시 어떻게 알고 있었겠는가? 우리는 다소간의 현대 주석학자들이 요엘을 B.C. 9세기 말엽의 요아스(Joash) 왕의 시대로 시기를 잡도록 여전히 이끄는, 문제가 되는 구절들의 조사에 의해서 그들이 인도되었다고는 거의 추정할 수 없다.
연대기적 기준들이 12 예언서들의 배열에 있어서 결정적이었다는 한도에서, 기준들은 올바른 기준들, 특히 치세 연대표들이었다. 그런 자료들은 호세아, 아모스, 미가, 스바니야, 하깨, 그리고 즈가리야의 책들의 서두에 제공되었다 ; 그리고 그것들은 참으로 12 예언서의 집성을 위한 연대기적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나머지 여섯 책들 각각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는 그 틀 안에서 그것의 특별한 배치를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의 한 요소는 G2) 전승 안에서 보여지는 12 예언서들의 재배치이다. G는 연대기에 두드러진 관심을 보인다. 이는 예를 들어 판관기에 이어진 룻기의 배치와 역대기들 다음에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배치에 의해 입증된다. 우리는 호세아, 아모스, 그리고 미가가 함께 그룹지어져 있고, 12 예언서들 중에서 세 책들의 서두에서 저자들이 8세기 왕들의 통치 기간에 속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G 안에서도 정확하다. 다른 한편으로 요엘은 비슷하게 시대를 구분할 수 없는 오바디야와 요나와 비교하여 후대에 위치하여 왔다. 명백히 G 전승은 이 재배치에 반대하는 요엘에 대한 연대기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요엘서3) 안에는 연대기적 자료가 부재하다는 관점에서, 히브리 12 예언서들을 수집하여 배치했던 이들은 호세아와 아모스 사이의 요엘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다른 기준들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기준들은 그들에게 자기 증명적인(self-evident), 마치 서두에서의 시대적 언급들처럼 분명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비록 요엘 안의 용어가 자주 12 예언서 안에 포함된 다른 저작들을 상기시키지만, 가장 두드러진 유사점들이 요엘과 아모스를 연계시킨다. 더욱이, 이러한 문자적 일치들은 요엘서의 끝부분에서 발생한다 : 요엘 4,16aα와 4,18a는 아모 1,2a과 9,13b에서 그들의 대응구들을 갖는다. 이것이 단독으로 아모스 전의 요엘의 위치를 설명할 수도 있다. 그 이상으로 연계는 요엘 4,16aα와 아모 1,2a에서의 규정들 사이의 대응에 의해서도 제시된다 : 배치자들은 아모 1,3-2,16에서의 국가들에 대한 예언들을 요엘 4장에서 선포된 심판의 다듬음(elaboration)으로서 생각할 수 있었다. 특히 요엘에 의해 선택된 국가들―띠로, 불레셋, 그리고 에돔(4,4. 19.)―이 아모스(1,9-10, 6-8, 11-12)에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내용의 주제들이 아모스 이전의 요엘의 위치, 그리고 책이 구성되었던 시대에 관한 약간의 지식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히 최근에, 주제별로 관련된 자료가 더 오래된 저술을 미리 말해주는데, 이는 더 오래된 저술의 해석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공통 문학(common literary)의 발전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 절차는 모세오경의 원천들의 편집에서 가장 분명하고 광범위하게 입증되는데, 이는 또한 예언 문학을 형성하였던 편집 과정에서도 매우 명백하다. 십중 팔구 12 예언서들의 수집을 배치했던 이들은 우리가 요엘이 선포한 빛 안에서 아모스와 다음의 예언서들을 읽기를 원했다. 예언서들의 마지막, 정경적 집성에서 예언적 자료들을 지배하는 관점과 매우 유사한 포괄적인 예언의 관점이 바로 요엘 안에서 맹백하다.
2. 요엘의 시대
사실 요엘은 정경 안에서 그와 가까이 있는 옆의 예언자들보다 상당히 후대이다. 책에서 일반적인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언급들을 우선 생각해 봄으로써 그를 시대구분하는 문제를 채택해 보자.
요엘 4,1-3은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Ⅱ)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국민의 대부분을 유배보냈던 587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전개되기 시작한 대변동의 운명을 가정한다. 이 잊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은 이미 요엘의 관점으로부터 고대 역사에 속한다. 따라서 539년 페르시아에 지배권을 넘겨준 바빌론이 더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대신 유다의 땅과 주민들이 일정 기간 동안 무방비로 놓여 있기 전의, 이방 국가들에 대한 유다의 비참한 버려짐을 일반적으로 언급한다. 유배의 시기로부터 요엘이 상당한 거리가 있음은 다음의 구절들에서 확증된다. 515년 이후에 건립된 성전의 현존이 예언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것이다(1,9. 14. 16; 2,17; 4,18). 더욱이, 2,7절과 9절에서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일상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 도시의 요새화가 일정 기간 동안 재건되었음을 함축한다 ; 그렇지만 재건은 오직 느헤미야의 지시 아래 445년에 수행되었다. 그래서 최초로 이는 우리에게 요엘에 있어서 terminus post quem이 5세기 후반부에 있다는 것을 제공한다.
또한 terminus ante quem을 발견하는 것은 가능한가? 4,17bβ에서의 진술은 그것이 312년에 프톨레매오 소테르(Ptolemy Soter)에 의한 예루살렘의 정복을 상기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충분한 역사적 특징을 결하고 있다. 이것은 4,19에 있는 에집트와 에돔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진실을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4,4에서 추정되는 페니키아의(Phoenician) 도시들인 띠로와 시돈과 필리스틴의(Philistine) 도시들과의 상업적 연관은 페르시아 시대와 근접함을 지적한다. 시돈이 관계되는 한, 페르시아 시대는 이미 343년에 종결되었는데, 이는 332년에 알렉산더의 군사행동 시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르닥사싸 3세 오코스(Artaxerxes Ⅲ Ochus)에 의해 그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이다. 대개 시돈은 343년 이후로 띠로와 더 이상 밀접히 연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돈은 Arvad와 Byblos를 따라 알렉산더 대왕에게 즉시 항복했는데, 반면에 띠로는 7개월 정도, 그리고 Gaza는 2개월 정도를 그에게 저항했다. 참으로 마케도니아는 오직 시돈의 두 함대들(약 200척의 배를 지닌)의 원조를 받고서야 띠로를 정복할 수 있었다. 아무튼, 4,6은 332년의 사건들이 미래적으로 무척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리스는 일정한 거리를 지닌 주거지로서 묘사되는데, 오직 페니키아-필리스틴(Phoenician-Philistine)의 중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즈가 9,13(M)에 반영된 매우 다른 모습을 비교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리스는 예루살렘의 근접한 적대자로 되었다. 이제 4,4-8은 요엘에게 후대의 추가인 까닭에, 책의 더 오래된 양식는 확실히 343년 이전에 현존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광범위하게 인용된 증거는 요엘이 445년과 343년 사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책이 예루살렘의 내부적인 사건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일별은 이 시대를 확증한다. 지도자의 권한은 원로들과 사제들에 의하여 소유되었다 : 1,2. 13-14; 2,16-17. 이것은 유배 이후 공동체의 정치적 확립을 전제하는데, 이는 Josephus가 “神政”(theocracy)으로 명명하였듯이 사제들이 통치를 행했다. 왕과 궁중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음이 유배 이전 상황을 미리 배제한다 : 1,2은 명백히 모든 백성을 표현하는데, 지도자들도 포함하고 있다 ; 그리고 1,5-14와 2,15-17은 예외 없이 비탄과 참회를 하도록, 국민과 지도자의 모든 부분들을 분명하게 소집한다. 더욱이, 후대의 유배 후기 공동체의 예배적 실행은 틀에 박힌 방법에 의해 명확하게 지시된다. 이는 “곡식 봉헌들과 포도주 봉헌들”(1,9. 13; 2,14)로 언급되며, 그리고 이 tāmȋd 봉헌은 중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제들을 “야훼의 대리자들” 그리고 “제단의 대리자들”(1,9. 13; 2,17)로서 지적하는 것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2,7과 9절에 예루살렘 성벽이 언급되는데, 일상적인 방식이었음을 주목하라. 모든 것들을 고려해 보면, 요엘로부터 나타나는 안정된 예배적 공동체의 모습은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따르는 시대와 가장 밀접하게 대응한다. 이것은 위에서 최초로 한계를 설정했던 시기의 후반부인, 즉 4세기 전반부에서의 책에 대한 상황임을 가리킨다.
우리는 요엘을 시대구분하는데 있어서 어휘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이미 요청했다. 이 관점에서 몇 가지 두드러진 예들이 있는데, 책의 전문용어는 오직 구약의 가장 후기 문학 계층과 부합한다. 따라서 חꗚꚆ(“무기, 화살” 2,8)는 다른 곳에서는 없고 오직 욥 33,18; 36,12; 2역대 23,10; 느헤 4,11[17]. 17[23]에서만 입증된다 ; 그리고 ףוֹס(“뒤, 결론” 2,20)은 오직 2역대 20,16; 전도 3,11; 7,2; 12,13에서이다. הꗺꖖ(“악취” 2,20)는 또한 집회 11,12에 나오지만 구약성서의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부가적인 구약성서의 증명들을 결하고 있는 다른 용어들은 아마도 꽤 후기에 형성된 것이다 : 1,8에 나오는 הלא(“비통해 하다”) ; 1,17에 나오는 שׁבע(“시들다”), תוֹדꙢ(“씨앗 낟알들”), תוֹפꙣꔾꗮ(“흙덩어리”), 그리고 תוֹרꔽꗹꗫ(“곳간”). 그리고 2,7에 나오는 טבע(Ⅱ : “코스를 바꾸다”). 2,13b와 14a에 나오는 구절들은 오직 요나 4,2과 3,9에서 정확한 대응구절을 갖는다. “동쪽” 그리고 “서쪽” 바다들의 대구들은 2,20과 즈가 14,8을 분리시키면 입증되지 않는다. “불쌍히 여김”(ה꘍וּח 2,17)의 탄원은 다른 점에서 느헤 13,22에 한정된다.
이전 예언자들에 대한 요엘의 설명가능한 상당한 의존은 일반적으로 책의 후기 시대를 가리키는 요인들 중에서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니다. 그러나 3,5은 특히 terminus post quem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 여기서 요엘은 야훼의 말씀으로써, 오바 17a의 상당히 후기의 격언을 인용하는데, 오바디야는 그 자체로 5세기 중반 이전으로는 보기 어렵다. 2,11과 3,4에서 그는 더욱 명백히 말라기의 선포(3,2. 23[4,5])로부터 주제어들(catchwords)을 인용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요엘이, 말라기와 뚜렷이 대조하여, 그 스스로 예배의 남용들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보다 분명하며 그리고 보다 중요하다. 사제적 직무와 희생적 실천은 요엘의 시대에 있어서 견고하게 뿌리내렸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노력들이 이 두 예언자들의 활동들 사이에 들어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만 한다.
따라서 여러 측면들로부터, 증거는 요엘의 시대가 4세기 전반부라는 것을 우리에게 지시한다. 예배적 공동체는 잘 조직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에 순하게 기능하는 부분으로서, 공동체는 더 이상 외적인 불안으로 곤란받지 않았다. 공동체의 神政 지도자와 그 길을 인도하는 정경화된 Torah를 가지고, 매일의 희생들을 실천하고, 이방적 요소가 있는 모든 것 안에서 스스로를 정화하였고, 공동체의 분위기는 공동체 자신의 구원에 대한 절대성과 야훼의 왕국의 옥좌로서 예루살렘이 선택되었음에 하나의 신뢰를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1835년에 Wilhelm Vatke에 의하여 최초로 지지되었던, 요엘서가 유배 후기 시대라는 것을 자체적으로 확증하고 분명히 했다. 그때 이후로 더욱 많은 인정들이 발견되었지만, 그럼에도 반대되는 소수의 목소리들이 있다. 이들은 여전히 9세기 말엽의 요아스 왕의 시대, 또는 아모스와 호세아의 시대, 또는 예레미야의 시대라는 시대구분을 옹호하고 있다.
3. 요엘서(The Book of Joel)
최근 수십년간에 있어서 요엘 연구는 일차적으로 책의 단일성(book’s unity)의 문학적 문제를 다루어 왔다. 이것은 1872년 Maurice Vernes에 의하여 최초로 제기되었고, 1896년 J. W. Rothstein에 의하여 많이 진척되었다 ; 그렇지만 1911년 Bernhard Duhm은 가장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Duhm에 의하면, 1-2장에서 매력적인 시인이 메뚜기 침입을 묘사하였고, 반면 3-4장에서는 마카베오 시대의 회당 설교자가 온화한 산문으로 그의 종말론을 발전시켰다. 설교자는 1-2장의 원초적 본문과는 무관한 1,15과 2,1b-2a, 11b를 삽입함으로써 초기의 시적인 자료들을 자신의 작업 안에 통합시켰다. 약간의 수정을 거치면서 요엘서의 2 단계 형성(two-stage formation) 논제는 많은 해석가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최근의 사람들 가운데 Sellin과 Robinson 같은 이들이 그렇게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 책의 분할에 관한 의심들이 더욱 더 강력하게 제기되어 왔다.
1장과 2장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각각에 대한 문제를 규정하고, 이미 그것의 해결을 결정한다. 정확히, 야훼의 날 구절(1,15; 2,1-2. 10-11)은 별문제로 하고, 우리는 2장에서 다루는 재난이 1장에서 묘사된 재난과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심지어 비슷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1,4-20이 최초의 경제적 대변동에 직면하여 그것을 피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반면, 2,1-17은 이러한 일시적 위기의 빛 안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도래할, 마지막 대변동을 보는데, 이는 일견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2,3b; 11bβ). 관계에 대한 이러한 특성 묘사는 다음의 관찰들에 근거한다.
a) 그들 스스로의 비탄의 기도들 안에서 처럼, 공동적인 비탄의 요청 안에서, 1장은 이미 일어났던 재난들을 다시 보는데, 그리고 전체적으로 선포적인 완전한 양식들을 사용하면서, 그렇게 한다. 대조적으로, 2,1-17은 경각의 외침과 그리고 참회의 요청 안에서, 멀지 않아 도래할 재난들만을 향하여 주의를 돌린다. 참회에 대한 요청의 서언(2,12 “그러나 이제라도”)과 요청 자체는 가장 최근에 선포되었던 것(2,1-11)과 이미 1장에서 탄식했던 것 사이를 각별히 구별한다.
b) 1장이 메뚜기떼에 의해 초래된 이상한 경제적 대변동을 보여주는 반면, 2,1-17은 더 이상 메뚜기떼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것의 경각의 외침 안에서 이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었던 종류의 황폐화시키는 적의 무리를 예상한다(2,2b; cf. 2,6a). 결과적으로, 2,17에서의 기도는 1,16-20에서의 비탄에서 처럼, 糧食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1장에서 선행되지 않았던 주제인, 하느님 백성에 대한 세계의 국가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c) 1장에서는 자연으로부터의 관찰들이 재앙의 묘사를 통하여 사용되는데도 불구하고, 2장은 대부분 야훼의 날의 예언들에서 적의 묘사들로부터 전통적인 요소들을 채택한다. 확실히, 이러한 후자의 요소들은 메뚜기 침입에 의해 영감을 받은 모습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이전 예언들의 종말론적인 적의 무리에 대한 묵시적 색채(경향)를 준다.
지금까지 1-2장에서 고려에서 제외하여 남겨두었던 야훼의 날의 구절들에 관한 관찰들은 모든 것을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데, 즉 1,15과 2,1b. 2a. 11b가 무관계한 문제가 아님을 나타낸다. 이에 반하여 2장에 대한 1장의 관계는, 1,6a로 시작하는 많은 특별한 정식들(formulations)을 포함하여, 이러한 구절들의 근거 위에 대부분 명료해 진다. 현재의 순간에 예루살렘이 당면하고 있는 이상한 경제적 비상사태(1장)는 하나의 표징(1,15)으로 선포된다. 이는 이전의 예언에 의하여 위협되었고 요엘에 의하여 새로이 분명하게 말해진, 예루살렘의 종말론적 파멸이 임박하다(2,1-11)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의 단일성은 명료한 방식에 의하여 예시되는데, 1장과 2장이 그들의 전체성 안에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고 1,15; 2,1-2. 10-11과 3,3-4; 4,14-16 안에서 주요한 종말론적 주제어들의 연속성에 의거하여 독자적으로 추정할 필요가 없다.
이제 2,18-19a. 21-27과 1장이 동일한 주제―예루살렘의 경제적 곤경―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3장과 4장은 이에 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인정이 1-2장이, 그들이 그 자신의 시대 안에서 뿌리내린 예언을 보여주기 때문에, 순수히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전개되는 3-4장과 반대 입장에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필연적으로 이끄는 것인가? 확실히 그렇지 않다. 우리가 2,1-17과 1장 사이에 묘사했던 관계를 무시하는 것에 더하여, 그런 결론은 2,27과 4,17에서의 평행구인 “인식의 보증”(assurances of recognition)에 의하여 형성된 책의 두 부분들 사이의 유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더욱이, 2,19b-20은 이미 종말론적인 재앙의 반전을 예고한다. 책의 전체 메시지가 고려될 때, 결정적인 전환점이―두 번째 장에서뿐만 아니라 책 전체에 있어서도― 2,17과 18 사이의 접합에서 맹백해 진다. 여기서 선행하는 비탄의 외침들로부터 이 탄원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간주되는 뒤따르는 신탁들에로의 갑작스런 전환이 있다. 이 중앙점의 양 측면에서의 책의 부분들이 거의 완전한 대칭을 형성한다. 지금의 양식들의 부족에 관한 비탄(1,4-20)은 이 재난이 반전되리라는 약속(2,21-27)에 의하여 균형잡힌다. 예루살렘에 대한 절박한 종말론적 대변동의 선포(2,1-11)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역시 반전되리라는 약속(4,1-3. 9-17)에 의하여 균형잡힌다. 중대한 필요로서 야훼께 대한 회개의 요청(2,12-17)은 종말론적인 필요로서 영의 부어짐과 시온의 구원(3장)에 의하여 균형잡힌다.
그래서 책은 매우 분명하게 두 주요한 부분들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두 부분들을 서로 다른 저자들에게 귀속시킨다면, 이해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권리를 상실한다. 오직 책 전체를 포괄하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강조들이 결합되어 있는 구조적인 전체 윤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 1,2-3에서 세대들에 대한 호소는 엄숙한 교육적인 도입과 교훈적인 권고를 구체화한다 ; 1,4과 2,18에서의 이야기 형식(narrative frame) ; 그리고 2,27과 4,17에서의 요소들을 연결하고 결론짓는 병행구를 지닌 2 단계 자기 계시 신탁(two-stage self-disclosure oracle)의 최후의, 중대한 구성. 1-2장과 3-4장 사이의 주요한 주제어들과 단어군들의 동일성은 그들의 공동 출처를 더욱 더 입증한다 :
“거룩하게 하다[ושׁדק] … 선포하다[וארק]”
참조. 1,14 그리고 4,9 ;
“왜냐하면 야훼의 날이 임박하다[הוהי םוי בורק יכ]”
참조. 1,15 그리고 2,1bβ-2aα과 4,14 ;
“야훼의 날이 다가온다[הוהי םוי אוב]”
참조. 2,1bα 그리고 3,4b ;
“어둠[ךשׁח] …”
참조. 2,2 그리고 3,4 ;
“피하는 자가 되다[הטילפ היהת]”
참조. 2,3 그리고 3,5 ;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ץראו םימשׁ ושׁער]”
참조. 2,10a 그리고 4,16aβ ;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은 빛을 잃는다
[םהגנ ופסא םיבכוכו ורדק חריו שׁמשׁ]”
참조. 2,10b 그리고 4,15 ;
“그리고 야훼는 그의 목소리를 발한다[ולוק ןתנ הוהיו]”
참조. 2,11a 그리고 4,16aα ;
“엄청나고 가공할 야훼의 날[ארונהו לודגה הוהי םוי]”
참조. 2,11b 그리고 3,4b ;
“모으다[וצבק] …”
참조. 2,16 그리고 4,(2). 11 ;
“국가들[םיוגה] … 나의 백성과 나의 유산[יתלחנו ימע]”
참조. 2,17 그리고 4,2.
그러나 네 개의 장들의 기존적 구성이 단일한 저자로부터 유래하지만, 이것이 후대의 문학적 첨가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제2차적 작업에 의한 그러한 첨가의 가장 분명한 경우는 4,4-8인데, 여기서 문장 구조와 관점은 이 구절들을 책의 나머지 부분과 동떨어지게 한다. 2,26b에서의 명백한 첨가는 필사 실수에서 초래된다고 여겨진다. 4,18-21이 4,17의 제2차적 연장이라는 특성을 보이지만, 그것이 요엘 자신에 의하여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2,3bβ와 3,2와 같은 짧은 삽입들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3장을 후대의 첨가로서 간주하는 강력한 이유는 없다 ; 4,1-3은 2,27보다는 3,5에 연결시키는 것이 보다 적절하며, 그리고 요엘이 여기서 반영하는 전승은 2,25-27과 3,1-2 사이의 연결을 지시한다.
책의 장 구분들은 원문들과 역본들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최초로 Stephen Langton(c. 1205)은 Vulgate text of Joel을 세 개의 장으로 세분하였다(1,1-20; 2,1-32; 3,1-21). 14세기에 이 구분은 또한 the first Rabbinic Bible of Felix Pratensis의 Daniel Bomberg(Venice, 1516-17)의 인쇄를 통하여 계속 사용되고 있는 Hebrew Bible은 물론 G와 대부분의 다른 번역들에 도입되었다. 2장을 세분함으로써 책을 네 개의 장들로 나누는 재구성(1,1-20; 2,1-27; 3,1-5; 4,1-21)은 최초로 the second Rabbinic Bible of Jacob ben Hayyim의 Bomberg의 인쇄(1524-25)에서 나타났다 ; 이 네 개의 장 구분은 Hebrew Bible에 있어서 통례적인 것의 하나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4. 요엘의 언어
만약 우리가 주요한 구조적 단위들의 신뢰할 수 있는 보다 큰 구성을 먼저 조사한다면, 책의 언어의 명료함은 가장 잘 평가된다.
1,2a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침을 받으라는 요청”과 1,3에서 세대들을 관통하는 “전달에 관한 권고”는 요엘의 기본적 논조를 놓으며, 그리고 세대들의 비교에서 반영되었던(1,2b) 이상한 것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의하여 애초부터 지혜문학적-교훈적(sapiential-didactic) 경향을 드러낸다. 미래의 세대들에게 사건의 뉴스들을 전해야 하는 임무의 중요성은 1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충분히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한 명료함은 그 임무가 책의 남아있는 부분들에 의하여 알려졌을 때만이 오직 성취된다. 이는 그것들이 현재의 위기가 미래에 영향을 주는 한도에서 단독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엄청난 “비탄 전례”(lamentation liturgy)의 양식로 분명히 말해진다. 그것의 구성 부분들은 게시와 반포의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하나의 소책자, 편의적인 모든 것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표현되는 전례와 비탄 예식의 실제적 실행 사이에는 거리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것이 1,4과 2,18에서의 이야기 진술들에 의하여 특히 명백해진다. 이야기 진술들은 가공할 현재의 대변동뿐만 아니라 야훼의 자비에 결과하는 쇄신과 관련된 본질적 사실들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이러한 간략한 보고들의 각각은 그래서 그것을 뒤따르는 전례적 내용의 부분에서 가장 생생한, 화려하게 예술적인 방식으로 다듬어진다. 두 전례적 부분들은 전통적인 비탄 예식의 전형적, 기본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 첫째, 네개의 연으로 확장된(1,5-14) “공동 비탄의 요청”(call to communal lamentation)은 비탄의 외침들(1,15-18)과 비탄의 기도들(1,19-20)로 이어진다 ; 그리고 둘째, “탄원에 응답하는 보증 신탁들”(assurance oracles answering a plea)은 그들의 특징적 모습들(2,19-27)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러한 전통적 비탄 전례의 주요한 구조적 부분들은 광범위하게 다듬어지며, 그리고 전례 그 자체가 후대 세대들에게 전달할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첨가되는 내용 때문이다.
최초의 장의 비탄들은 우선 엄청난 “경각 외침”(alarm cry)에 의해 2,1-11로 이어진다. 엄청난 경각 외침은 적의 묘사를 포함하는데, 여기서 ―1장에서 야훼의 날의 징조들 후에― 피할 수 없는 야훼의 날 자체가 선포된다. 그것의 맥락에서 이 경각 외침은 1장의 공동 비탄의 요청에서의 계기가 되는 구절들(motive-clauses)의 기능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참조. 2,1a with 2,15a). 그렇지만, 이것은 경각이 진실한 비탄 예식의 전제 조건으로서 예훼께 대한 완전한 회개의 직접적 요청(2,12-17)으로 이어진다. 그것에 의하여 고대 비탄 전례의 첫번째 부분은 고유한 관심의 증대(unique doubling)를 받는다. 지배적인 시대 범주들(1,2b. 15; 2,1b. 2a. 2b. 11b)과 특별한 내용적 특징들의 관점에서, 이 증대된 관심은 현재의, 일시적인 위기가 종말에 선포된 재난과 병행하는 연속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데, 두 부분들은 적절히 비탄과 참회의 서로 다른 반응들을 나타낸다.
전례의 두번째 주요한 부분은 대응하는 방식 안에서 전개된다. 이미 지지할 만한 “탄원에 응답하는 보증 신탁들”의 시작에서 식량의 부족(2,19a)뿐만 아니라 종말의 고통(2,19b-20)에 대한 반전이 약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뒤따르는 것 안에서, 두 가지의 다르게 구성된 “탄원에 응답하는 보증 신탁”(2,21-24. 25-26)이 전자의 주제에만 머무른다. 2,27에서 여기까지 예루살렘이 견디어온 재난들로부터 구원되는 이러한 보증들이 “자기 계시 신탁”(self-disclosure oracle)으로 변형된다. 연속적으로 보여지듯이―이미 2,27b 그리고 이어서 3,1-5을 통하여 ; 4,1이하에서 4,17까지― 그것은 2 단계(two-stage) 자기 계시 신탁으로 더욱 확장된다. 그러므로 현재 재난들의 약속된 반전은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는 인식을 위한 기초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 그것을 넘어서서, 후의 단계에서(3,1a) 예루살렘을 향한(3,15) 그리고 세계 국가들을 향한(4,1-3. 9-17) 야훼의 마지막 행동이 그의 백성은 “결코 다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27b)는 확실성을 확증한다. 2,27에 있는 “인식 정식”(recognition formula)은 그러므로 두번째 주요한 부분 안에서의 수단들인데, 이에 의하여 최초의 탄원에 응답하는 보증 신탁이 또한 종말론적 선포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이것은 우선 예루살렘을 위한 무조건적인 선포들(3,1. 5) 그리고 국가들에 대한 처벌을 유발하는 위협들(4,1-3) 안에서 명백하다. 그런 다음 또 다시 특히 환상적인 언어로, 그것은 전쟁과 심판의 소집에 대한 반어적(ironical) 요청들(4,9-14) 안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2,1-11에서의 적의 묘사와 관련한 경각 외침에 대한 화려한 대응구를 제공한다. 그리고 경각 외침과 같이, 요청들은 야훼의 날을 특징짓는 神顯(theophany)의 표징들을 드러내는 매우 유사한, 종종 말 그대로의 묘사(4,15-16; 참조. 2,10-11)로 나아간다. 두번째 구절의 종말론적 메시지는 4,17 안에서의 종결로 이어지는데, 이는 2,27로부터의 인식의 보증을 다시 계속하고 그럼으로써 2 단계 자기 계시 신탁으로 다듬어져 온 탄원에 응답하는 엄청난 보증 신탁을 완결한다.
요엘서에서 지지되는 양식들의 양식 비평(form-critical) 분석과 그것들의 특징적인 다듬음은 책의 단일성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우리가 예술적인 문학 구성을 갖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확실히, 수사학적 양식들은 거의 전문적으로 사용되었다 : 교육적인 도입과 교훈적인 권고 후에, 우리는 공동 비탄의 요청, 비탄의 외침들, 그리고 비탄의 기도들을 발견한다 ; 그 다음에 적의 묘사를 지닌 경각 외침 그리고 참회의 요청 ; 그리고 마지막으로 탄원에 응답하는 보증 신탁들 그리고 구원과 처벌의 선포와 전쟁에 대한 그들의 요청들 안에 세워진 자기 계시 신탁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들에 있어서 이러한 개별적 양식들은 예술적 윤색을 통하여 또는 단일 양식이 혼합되는 다른 예들을 통하여, 이미 그들의 원래적 생활 환경과는 눈에 띄게 구별되었다. 전자는 1,5-14에서의 공동 비탄에 대한 네개 연(four-strophe)의 요청, 2,4-9에서의 경각 외침과 연결된 엄청난 적의 묘사, 그리고 2 단계 자기 계시 신탁의 경우들에서 발생한다. 후자는 1,15-20에서의 여러 가지 비탄 단편들, 2,19-27에서의 다양한 보증 신탁들, 그리고 4,9-14에서의 전쟁과 심판의 소집에 대한 다른 요청들 안에서 명백하다.
따라서 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문학 작품이다. 그것 안에 취해진 언사 양식들(speech forms ; 예배, 거룩한 전쟁, 그리고 이전의 예언 안에서 흔한 양식들)과 대조하여, 책의 사회적 기능은 일종의 “문학적 대항”(literary opposition)[즉, 널리 퍼져있는 이념들과 제도들의 문학적 비평]이다. 책은 이미 성경으로 변화된 이전의 예언과 관련하여 이해를 위한 엄청한 열정을 쏟음으로써(1,2-3; 2,27; 4,17) 계속된다 ; 그것은 강화된, 종교적으로 자기 확신에 찬 神政의 예배적 공동체 안에서 재활력(revival)에 영향을 주는 임무에 참여한다.
세부적으로 요엘의 언어는 이전의 예언적 운동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이 해석의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전체적인 결과들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
1. 때때로, 요엘 자신은 야훼의 말씀으로서 이전의 예언적 언사를 도입한다.
2. 완전한 문장들이 결정적인 위치들에서 차용된다 : 1,15(참조. 4,14b)에서의 이사 13,6(물론 에제 30,30,2-3) ; 4,16aα에서의 아모 1,2 ; 그리고 또한 2, 1-2에서의 스바 1,14-15로부터의 커다란 단어군들.
3. 개별적 주제어들은 물론 상당한 양의 작은 단어군들이 요엘 자신에 의하여 구성된 문장들 안에 끼워 넣어진다 : 나훔 2,11b[10b]로부터 2,6b에서의 “모든 얼굴들이 창백해진다” ; 이사 13,13으로부터 2,10a에서의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 이사 13,10로부터 2,10b에서의 “해, 달 그리고 별들”이 빛을 잃는다 ; 말라 3,2. 23[4,5]로부터 2,11b(참조. 또한 3,4)에서의 “누가 야훼의 엄청나고 가공할 날을 견딜 수 있는가?”라는 질문 ; 요나 4,2에서 처럼 2,13b에서의 “회개”를 위한 동기, 즉 야훼는 “화를 내는 데 느리시며,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이 그득하시며, 그리고 해악을 뉘우치신다” ; 요나 3,9(참조. 스바 2,3)에서 처럼 2,14a에서의 “아마도 그분은 돌이키시고 한 번 더 뉘우치실 것이다”는 희망 ; 예레 1,14-15; 4,6; 6,1. 22와 에제 38,6. 15; 39,2를 모방하여 2,20에서의 “북쪽 사람”으로서 멀리 있는 적의 개념 ; 이사 45,5. 6. 18. 22; 46, 9로부터 2,27에서의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며 “그리고 다른 신은 없다” ; 에제 39,29(참조. 즈가 12,10)로부터 3,1에서의 야훼는 “[그의] 영을 부어줄” 것이다 ; 오직 예레 33,15; 50,4. 20에만 있는 것처럼 4,1에서의 “그러한 날들과 그 시간에는”이라는 표현 ; 이사 66,18a에서 처럼 4,2에서의 야훼는 “모든 국가들”을 모은다 ; (오바 15에서 처럼 4,4에서의 적들의 행위들은 그들 자신의 머리들 위에 보복된다) ; 예레 6,4로부터 4,9에서의 거룩한 전쟁을 준비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는 소집들 ; 미가 4,13; 예레 25,30; 이사 63,3; 17,5에서 처럼 4,13에서의 곡식들의 수확과 압착에 비유된 전쟁 행위 ; 이사 13,4; 에제 7,11-13; 30,4. 10. 15; 39, 11. 15에서 처럼 4,14에서의 [전쟁의] “소동”이라는 주제어 ; 이사 8,18에서 처럼 4,17aβ에서의 야훼는 “시온에” 거주하신다 ; 이사 52,1에서 처럼 4,17b에서의 이방인에 의해 더 이상 횡단되지 않는 “거룩한 장소”인 도시, 예루살렘 ; (아모 9,13에서 처럼 4,18a에서의 “산들이 포도즙을 흘릴 것이다” ; 에제 47,1-12[참조. 즈가 14, 8]에서 처럼 4,18b에서의 샘물이 성전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4. 때때로 우리는 2,3b에서 이사 51,3a, 그리고 4,10에서 이사 2,4(미가 4,3) 처럼, 그것들의 원래 의미를 거꾸로하는 의미를 지닌 중요하고 드문 문장들을 발견한다. 이것은 요엘이 전달된, 예언적 언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요엘의 자유와 독립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5. 요엘에 의하여 사용된 언사의 모든 중요한 양식들이 그것들 주제의 내용과 함께 예언적 전통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상세한 모든 대응구들보다 더욱 중요하다. 비탄의 요청의 연결인 “울부짖음”(וליליה)은 1,15에서의 야훼의 날에 대한 “아아!”라는 감탄사와 함께, 1,5-14에서의 핵심 단어인데 그것의 모델로 에제 30,2을 갖는다. 2,1-11에서의 경각 외침은 예레 4,5과 6,1에서의 북쪽으로부터 적의 외침 경고(참조. 2,20)와 대응한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적의 묘사는 이사 13장에서의 야훼의 날의 표현들과 주제적으로 대응한다. 배가된 인식의 보증과 함께 자기 계시 신탁이 2 단계로 나누어지는 다듬음은 에제키엘에서 발견되는 양식들을 지속하며, 그리고 특히 2,27로부터 3,1로의 전이는 에제 39,28-29에 의하여 결정된다. 4,9-14에서의 전쟁에 대한 소집들은 에제 29, 30, 32, 35, 38-39장은 물론 예레 46장과 49-51장에서의 국가들에 대한 신탁들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전 예언의 양식들에 대한 이상의 모든 의존의 관점에서 우리는 요엘의 독립성에 관한 중요한 지시로서, 그가 제재(material)가 표현하는 대상을 능히 바꾼다는 것을 다시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 예를 들면, 에제 30,2-3에서의 에집트에 대한 신탁과 이사 13,6에서의 바빌론에 대한 신탁이 1,15에서 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신탁으로 바뀐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상세한 비교는 요엘의 언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 세 가지 복합적 전승이 있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 첫째, 야훼의 날의 예언들, 특히 스바 1-2장, 이사 13장, 에제 30장, 오바, 그리고 말라 3장 ; 둘째, 그리고 밀접히 연관된, 예레미야서(46, 49-51장)와 에제키엘서(29-32, 35장)에서의 국가들에 대한 신탁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쪽으로부터의 적들에 관련한 예언 신탁들(예레 4-6장; 에제 38-39장).
이러한 영향들의 인식은 두 가지 사항들을 불명료하지 않게 한다 :
1. 요엘은 어느 정도 그의 시대와 관련하여 말한다. 새로운 야훼의 말씀이 그에게 위임되었다. 메뚜기떼와 결핍의 대변동은 야훼의 말에 관련한 이제까지 실현되지 않은 예언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도록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권고하게끔 그를 인도한다. 이러한 이전의 선포는 그들의 대변동적 운명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요엘의 동시대인들에 의하여 이제 인식되어졌다. 회개에 대한 그러한 현재적 요청을 위한 권위는 다음에서 그 합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에제키엘서를 제외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신명기의-신명기계의 재앙 신탁들(Deuteronomic-Deuteronomistic curse oracles ; 신명 28,27. 33. 38. 49-51. 60) 안에서 그리고 회개에 대한 신명기계의 권고들(신명 30,10; 1사무 7,3; 1열왕 8,48; 2열왕 23,25) 안에서 이다.
2. 이전 예언들에 대한 요엘의 귀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요엘은 주로 그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그의 언어는 그의 예리한 눈에 의하여 식별된, 모든 이가 들어야 하는 그의 결심을 확실히 나타내는 구체적 이미지들을 지니고(1,5-14; 2,16-17; 4,2-3), 그리고 詩的 수준의 원초적 비유들을 지니고(1,6; 2,4-11; 3,1. 3) 그의 주제들을 강조하는(예를 들면 1,14; 2,9. 20) 자유로운―종종 세련된― 리듬들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 어떤 기능이 그의 언어에 의하여 반영되는가? 요엘이 사제 계층과 밀접하며 그리고 그가 전례적 양식들을 취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책은 전반적으로 사제적 임무의 문헌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밀한 의미로 “문학적 예언”(literary prophet)을 듣는데, 그가 예언적 저술들을 읽고 예언을 쓴다는 한에서 이다. 그는 예언자들의 문학적 전달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 … 괴로움을 당하는 예언자들의 열정을 지니고. 이들은 그것으로부터 그들을 위한 새로운 계시가 되는 결론들을 얻는다.” 그는 이사 34장(그가 여러 방법들 안에서 관련맺는 하나의 장이다)이 16절에서 정식화한 권고에 따라 수행한다 : “야훼의 책에서 찾으며 그리고 읽어라 : 그들 중의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그분의 입은 命했으며, 그리고 그분의 靈은 그것들을 모았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학문적 예언”(learned prophecy)과 마주친다. 학문적 예언은 지식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을 지닌, 그리고 지혜의 훈련에 대한 도움을 지님으로써 인정된 종말론적 메시지를 취하며, 그리고 야훼의 미래에 대한 강렬한 기대 안에서 종말론적 메시지에 새로운 표현을 제공한다. 공식적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종말론적 전통들이 시대와 관련하여 구체화된다는 사실에 새로운 차원이 있다 ; 새로운 선포를 위한 출발점은 현 시대의 고통 안에서 발견되는데, 동시대의 세대와 그의 자손들이 그럼으로써 참회의 요청에 다시 한 번 마주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요엘은 정경화된 토라의 입장을 취하고 토라에 의한 전례적 추종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궁극적 의지를 파악하는 집단들에는 거의 속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야훼의 새로운 행위들을 여전히 완전하게 기대하는 “종말론적 집단들”(escatological groups)에 속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4세기의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문학적 대항”(literary opposition)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에는 또한 이사 24-27장의 종말론적 칸타타들(cantatas)의 저자, 그리고 후대에, 즈가 12-14장의 저자, 물론(비록 모임의 다른 쪽 날개를 대표하지만) 언어적으로 관련된 요나 이야기의 저자가 속해 왔다.
5. 요엘의 메시지
요엘은 어떤 관심들을 일으키는가? 그의 주요한 주제는 야훼의 날이다. 어떠한 구약성서 증언도 요엘이 행하는 상세하고 체계적인 취급만큼을 그것에 결코 주지 못한다. 그의 책의 모든 부분이 이 주제(1,15; 2,1. 11; 3,4; 4,14)에 기여한다고 이해될 수도 있다. 야훼의 날은 그분의 미래 행위들의 약속된 시간인데, 그것에 의하여 그분은 이스라엘과 세계 국가들 사이에 결정을 가져온다. 야훼의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 안에서의 그것의 뿌리들로부터, “야훼의 날”이라는 주제어 아래에서의 예언적 종말론 안에서 후대의, 널리 퍼진 현상을 통하여, 그것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국가들 사이의 결정이다. 두 가지 대안이 요엘에게 가능하였다 : 야훼의 날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또는 이스라엘의 파멸에 결정적이 될 수 있다. 우선, 그 자신의 공헌은 양쪽 대안들을 체계적으로 취급한다는데에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1,4-2,17) 그는 심판의 예언적 관점을 채택하는데, 이에 따르면 야훼는 이스라엘을 파멸시키려고 국가들의 군대를 이끈다. 후반부에서는(2,18-4,17[21]) 그는 구원의 예언적 관점을 채택하는데, 이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국가들의 맹공격으로부터 야훼에 의하여 구원되고, 반면 국가들은 파멸된다. 양쪽 방향에서 주제를 전개시킴으로서, 요엘은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 사이의 입구에 서있다.
4세기 전반부에서 요엘이 야훼의 날을 그렇게 광범위하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말했을 때, 만약 잊혀지지 않았다면, 특히 예루살렘의 지도 집단들 안에서 적어도 대부분 억제되어왔던 하나의 주제를 그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토론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재도입한다. 유배 후 유다와 예루살렘의 재건(즈루빠벨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노력들을 통하여 4세기 초엽에 견고히 되었다)은 역사의 과정 안에서 이스라엘에 말하여진 야훼 말씀이 전체적으로 타당하게 실현된 것으로서 요엘에 의하여 인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제적 집단들이 의존하는 토라의 말씀과 비교하여, 예언적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 예언의 관점으로부터 이스라엘과 세계 국가들 사이의 관계―페르시아 통치의 정치적 구조에 통합되었던 동시대 예루살렘의 예배적 공동체에 의하여 대표되는 것으로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궁극적 의지와 일치되지 않았다는 것이 인식되어야만 한다. 확실히, 요엘은 확립된 예배를(그것의 관습들과 전통들과 사제들의 직무를 지닌) 당연시되고 그 자체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어떤 것(1,9. 13-14. 16; 2,15-17)으로서 취급한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그것을 하느님의 새로운, 마지막 행위들, 즉 정확히 야훼가 注意를 바꾸는 야훼의 날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 단지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요엘의 시대에서의 심각한 비상 사태는 그에게 관련된 출발점을 제공한다. 비록 그 당시 페르시아 제국에서의 정치적 상황들이 완전하게 항구적이고 확정적으로 보였지만, 황폐화시키는 메뚜기 공격과 대변동의 결핍(1,4-20)은 정말 이상한 사건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역사 안에서 여전히 발생하는 것으로(1,2b) 보았다. 정확하게 이것들은 역사가 토대가 흔들리는 변화들을 향하여 여전히 움직이고 있으며 그리고 야훼의 날의 예언적 주제가 아직 소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로 예루살렘과 유다와 그 지도자의 눈을 뜨도록 만든다. 이 점에서 메뚜기떼는 특별히 그에게 중요하다. 그것들은, “강력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국가”로서, 야훼의 “날”에 야훼 자신에 의하여 인도되는,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움직여서 황폐화시키는 종말론적 군대의 원형(prototype)으로서 생각된다(참조. 1,6 with 2,2-11). 야훼의 날의 징조로서 보여져야만 하는, 이미 현재하는 경제적 긴급 사태에 의해 촉발된 비탄을 넘어서서, 예루살렘은 우선 심판의 마지막 날의 새로운 선포를 인식하여야만 한다. 그 날에 야훼는 그분의 무적의 메뚜기 군대를 이끌 것이며,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멀리서부터의 적” 또는 “북쪽으로부터의” 적의 예언적 위협들을 실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한 동시대 사건은 혁명적인 마지막 사건의 선포를 지적한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경건한, 예배 중심의 자기 확신(pious, worship-centred self-assurance)이 인식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경제적 위기에 대한 예배적 비탄(1,16-20)은 그러므로 우선 종말론적 경각을 일으킨다(2,1-11). 1장으로부터 2장으로의 전이는 이 방식 안에서 확실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시대들을 비교하는 시작과 결정적 변화들에 관심을 둠으로써(1,2b; 2,2b), 이 “학문적 예언자”(learned prophet)는 그 자신이 예언적 예언(prophetic prophecy)과 묵시적 예언 사이의 입구에 서있음을 다시 보여준다.
오직 완전한 “회개”(return)만이 심판의 날에서 구원의 날에로 야훼의 날을 변경할 수 있다(2,12-13). 요엘이 “회개”의 요청을 제기하는 본문에서의 결정적인 점에서, 그는 신명기계 신학의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그 자신을 보여주는데, 반면 주제적으로는 그가 특별히 에제키엘에 의존하고 있다. “온 마음으로 회개하라”는 요엘의 권고는 신명기계 언어를 생각나게 한다. 즉, 단지 재건만을 기대하는 비탄의 예식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야훼의 도래를 향하여 진정으로 새로운 방식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재정향하는(reorient) 것이다. 그렇지만 주제 문제로 말한다면, 요엘은 에제키엘의 계승자이다. “회개”는 토라에(신명기계 역사 안에서 그러하듯이) 기초하지 않고, 오히려 예언적 선포에 기초하는데, 종말론적 경각이 이 경우이다(참조. 에제 33,1-20; 18,21-32; 3,20-21). 요엘은 이스라엘의 파수꾼의 임무를 한 번 더 떠맡는데, 그가 본 땅을 습격하는 재난에 직면하여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청한다(“그러나 이제라도,” 2,12). 에제키엘과의 현격한 차이는 요엘이 예루살렘이 외면한 모든 죄를 결코 한 번도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식될 수 있다. 반면 신명기계 역사가는 모세의 토라(Mosaic Torah)로부터의 근본적인 변절을 비탄하고 그것을 향하여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요엘에게 있어서는 예배적, 경건한 자기 충족이 예루살렘에 대하여 지시된, 야훼의 날의 예언적 말씀을 듣지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하다. 이것이 옷을 찢지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요청이다(2,13a). 회개는 본질적으로 요엘에게 있어서 예언적 선포의 기초위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지니고 누구나가 예루살렘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히 새로운 행위들을 대면하는 수단이다. 이것이 잊혀진 일반적 주제인 “야훼의 날”에 관한 그의 중심적 “선포 내용”(kerygma)이다.
요엘이 선포한 회개는 야훼의 자유를 위한 여지를 남겨놓는다(2,14). 그러나 “탄원에 응답하는 보증 신탁” 안에서 현재의 경제적 위기에 대응하여 서약된, 하느님의 자비가 우세하다. 더욱이 이 보증 신탁은 그 다음에 (공개되는 부분으로서) 책의 나머지를 구성하는 커다란 2 단계 자기 계시 신탁으로 계속된다. 식량 대변동의 반전은 야훼의 날 자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고대의 구원 약속들의 완성을 가져온다는 실현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2,27). 도래하는 하느님을 향하여 정향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오직 재건만을 기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분의 영의 부어짐을 통하여(3,1-2) 야훼 당신께서 공동체를 모든 구성원들 안에서 그분께 결합된 백성으로 재형성할 것이다. 현재의 신정적-위계적(theocratic-hierarchical) 질서는 그분의 영 안에서의 일치에 의하여 쓸모없이 될 것이다. 우주적 대변동들은 엄청나고 가공할 야훼의 날에 있어서 호소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도래하는 야훼의 날을 기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시온 산에 탈출이 있을 것이라는(3,5) 단순한 표지들이 된다. 예루살렘의 완전한 쇄신과 구원의 대략적 이미지와 병행하여, 분열하는 세계 국가들의 대응하는 이미지가 4장에 나란히 놓여진다. 국가들은 그들이 무방비의 예루살렘에 범했던 불의 때문에 선고를 받을 것이다. 야훼의 마지막 전쟁에서, 국가들의 운명은 심판의 싸움터에서 완결될 것이다(4,9-14). 그 다음에 야훼는 승리자로서 시온에 거주할 것이다 ; 그분의 현존에서 실제적으로 동일한 형벌의 심판을 받았던 그의 백성은(2,1-11) 계약의 하느님의 자비로운 그늘 안에서 피난처와 방해받지 않는 평화를 발견할 것이다(참조. 2,13b with 4,17).
따라서 시온 공동체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3장)과 그것의 전세계적 맥락(4장)이 4세기 전반부의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 제시된다. 현재는 얼마나 다른가! 현재의 신적 반응 안에서 새로이 자극되고 뿌리를 둔 선포(2,19-26)는 “이스라엘 한 가운데에서,”(2,27) 동시에 예루살렘과 전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도래하는 행위들을 위한 출발점을 확립한다. 요엘이 구원의 궁극적 시간으로부터(3,1-5) 예비적인 신적 반응을 구별하며 그리고 종말의 사건들 안에서 함께 결합된 이스라엘과 전세계 국가들의 운명을(여기서 이전의 예언적 발언이 명백히 언급된다) 보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요엘이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주의(apocalypticism) 사이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는 그 입구를 넘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종말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시간적 결과를 확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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