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아모스


– 아모스서의 이해와 아모스서에 나타난 “종교적 정의”에 대한 소고 –






1. 들어가는 말


2. 자료 및 연구사의 소개


  2.1 주석서


  2.2 학위논문


  2.3 기타


3. 아모스서의 이해


  3.1 시대적 배경


    3.1.1 정치․경제․사회적 상황


    3.1.2 종교적 상황


  3.2 드고아의 목자인 아모스


  3.3 연대


  3.4 아모스서의 구성과 형성과정


4. 아모스서에 나타난 “종교적 정의”


  4.1 북이스라엘의 성소(聖所)


  4.2 거짓 경신례


  4.3 예배 안에서의 정의


5. 연구 과제


6. 나오는 말


참고 문헌


덧붙이는 말








1. 들어가는 말




열두 소예언서 중 “아모스서”를 발표하게 된 순간 머리에 떠오른 첫번째 단어는 ‘정의’였다. 그래서 아모스서를 요약하고 아모스서에 나타난 정의에 대해 보다 관심있게 다루어 볼 작정을 하였다. 그러나 세미나 발표를 위해 자료를 찾으면서 아모스서에 나타나고 있는 정의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어줍잖게 새로 쓰는 것 보다는 기존의 연구논문들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모스서에 대해 일반적인 것, 즉 시대적 배경, 아모스의 생애, 연대 등은 이 부분에 대해 쓰여진 단행본에서 그대로 옮겼고, 아모스서의 구성과 내용에 대해서 이 분야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된 한동성의 논문1) 중 “아모스서의 구성과 형성과정” 부분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아모스서에 나타난 신학적인 주제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 “종교적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물론 아모스서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한국천주교의 현실을 직시할 때에 사회쪽보다는 교회자신의 정의문제를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료를 정리하다가 장광민의 논문2)에서 내가 쓸려고 한 글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소개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신학자는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평신도를 멸시해 왔다”고 말하였다. 교회내의 정의문제나 인권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언제나 내 머리를 스치는 말이다. 요즘 성직자는 성사의 자효적 효과(Ex opere operato)만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또 수도자는 가난한데 수도회는 부자라는 말도 들린다. 그리고 세속성을 자신의 영성생활의 기반으로 삼아야 할 평신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앞장서서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고 돈 몇푼으로 그 죄악을 종교적으로 해결하려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모스서에 나타난 “종교적 정의”에 대해 살펴보면서 떠오른 단상들을 적어보았다.




2. 자료 및 연구사의 소개




학문 연구에 있어서 선행의 연구 업적을 조사하고 검토하는 일은 가장 기초적인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선행의 연구 논저에 관한 검색 작업과 연구사의 정리는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에서 반드시 실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연구를 촉진하거나 기존의 연구 업적을 검색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한 각종의 문헌 정보들이 정리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문헌 정리는 모든 학문 분야에서 필요하며 성서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모스서에 대해 신학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를 할 때에 먼저 자료를 발굴․수집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이 자료들을 분석․평가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문헌들을 찾고 수집하여 그 문헌 자체에 대한 비판작업을 하는 것은 문헌분석에 앞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본 소고에서는 자료 및 연구사의 검토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기고 다만 여기에서는 그동안 찾은 자료를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겠다.


외국에서 발행된 문헌들은 괄호안에 묶어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기고, 우선 국내에서 발행된 문헌으로 우리말로 쓰여졌거나 번역된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발행된 아모스서에 관한 문헌들로 성서, 주석서, 연구논문 등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 내의 모든 자료들을 조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개신교에서 나온 자료를 찾다보니까 가톨릭에 관련된 문헌들을 찾는 데에 소홀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석서나 연구논문들은 조금 찾았는데 정작 중요한 아모스서의 한국어 번역본 성서들에 대해서는 빠뜨렸다.


아모스서의 한국어 번역본 성서가 언제 처음 발행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번역본의 발행에 대해서 궁금하기 짝이 없으나 이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기고, 아모스서에 대한 주석서라고 할 수 있는 책과 연구논문들을 따로따로 발행연도순으로 소개한다.




2.1 주석서




J. M. Meyers(김찬국 역),『호세아서,요엘서,아모스서,오바댜서,요나서』(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4). Peter F. Ellis(金允柱 譯),『신명기학파의 역사: 요수에서,판관기,사무엘서,열왕기,루드서,아모스서,호세아서』(왜관:분도출판사,1970). B. Dorogud(함성국 역),『아모스 연구』(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3). H. Mattew(박영철 역),『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서울:기독교문사,1978). 서인석,『요엘,아모스,하깨,말라기』(서울:성바오로출판사,1979). 서인석,『하느님의 정의와 분노-예언자 아모스』(왜관:분도출판사,1982(2판)). O. Schmoller 편저(배영철 역),『(랑게주석)호세아서,요엘서,아모스서』(서울:백합출판사,1983). H. W. Wolff(李陽九 譯),『예언과 저항: 아모스서 연구』(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5). C. F. Keil․F. Dellitu(홍성현 역),『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서울:기독교문화사,1985,1992(개정중판)). J. A. Motier(강성열 역),『아모스』(서울:두란노서원,1987). K. Gordon(이중수 역),『아모스』(서울:목회자료사,1990). 金正俊,『正義의 預言者: 아모스 註釋』(천안:한국신학연구소,1991). E. B. Puggy(송동섭 역),『아모스서, 오바댜서』(서울:크리스챤서적,1991). D. R. Sunukijan 외 4인(김영헌 역),『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나훔』(서울:두란노,1991,1994(개정초판)). A. Weiser․K. Elliger(박영옥 옮김),『호세아,요엘,아모스,즈가리야』(천안:한국신학연구소,1992). John Kalvin(존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12 소예언서 제2권: 요엘,아모스,오바댜』(서울:성서교재간행사,1992).




2.2 학위논문




金正薰,「아모스의 社會倫理」,연세대학교 석사학위,1975. 오경란,「예언자 아모스에 나타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연구」,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76. 박성팔,「아모스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정의」,광주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76. 최병용,「아모스서에 나타난 선민관」,광주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79. 소원석,「아모스 예언서에 대한 현대적 이해」,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83. 홍경원,「아모스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신탁”에 관한 한 연구: 계약전승의 측면에서 본 예언자 아모스의 정의의 문제를 중심으로」,한신대학 석사학위,1984. 김오현,「아모스에 나타난 선교사상」,아세아연합신학대학 석사학위,1984. 임경진,「아모스 예언자의 제의에 관한 기본 태도의 고찰」,광주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85. 김승천,「아모스의 神觀」,학교불명,석사학위,1985. 장명호,「아모스,이사야 예언에 나타난 지혜의 요소」,감리교신학대학 석사학위,1986. 이상훈,「아모스서에 나타난 사회정의 연구」,장로회신학대학 석사학위,1986. 박현식,「아모스와 존 웨슬레의 사회윤리관 비교 연구」,서울신학대학 석사학위,1986. 김영환,「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자들에 나타난 비판 사상 고찰」,대구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87. 朴露重,「아모스의 사회정의에 대한 연구」,침례신학대학 석사학위,1987. 강종석,「아모스,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난 야훼의 날에 대한 소고」,광주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87. 김상순,「아모스와 요한 칼빈의 사회윤리비교」,학교불명,석사학위,1987. 최기수,「아모스의 죄관」,침례신학대학 석사학위,1988. 장지욱,「아모스의 神意識에 근거한 민중이해」,침례신학대학 석사학위,1989. 이성은,「선지자 아모스의 하나님 사상에 대한 일 연구」,삼육대학 석사학위,1989. 전명희,「예언서에 나타난 지혜문학의 요소: 아모스와 이사야를 중심으로」,서울신학대학 석사학위,1990. 배광하,「아모스서에 나타난 “야훼의 날” 개념 고찰」,수원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0. 오동영,「아모스 호세아 예언자의 예언사상에 대한 고찰 – 사회정의와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사상을 중심으로」,대구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1. 박재현,「예언자 아모스의 메시지에 대하여」,대구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1. 李丙勳,「아모스서에 나타난 神學的 主題들에 대한 小考」,침례신학대학 석사학위,1991. 고승찬,「아모스 구원관의 종말론적 이해: 야웨의 날과 남은자 사상을 중심으로」,서울신학대학 석사학위,1992. 박희석,「아모스의 구원관」,장로회신학대학 석사학위,1991. 김영우,「예언자 아모스의 메시지에 관한 소고」,대구가톨릭대학교 연구과수료,1992. 李承容,「아모스의 社會正義 思想에 관한 理解와 現代牧會 使役에 대한 實踐方案」,침례신학대학 석사학위,1992. 김학봉,「아모스의 죄와 정의」,대구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3. 홍성혁,「아모스서에 나타난 신관에 관한 연구」,서울신학대학 석사학위,1993. 지반석,「아모스에 나타난 하느님에 대한 연구」,고신대학 석사학위,1993. 한동성,「아모스서의 구성과 신학-7,10-17을 중심으로」,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4. 장광민,「아모스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정의」,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4. 이원순,「아모스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審判과 正義」,대구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4. 이병로,「아모스 호세아서에 나타난 출애굽전승 연구」,침례신학대학 석사학위,1994. 류요한,「아모스 7장 10-17절을 통해 본 고대 이스라엘 전승의 수용과 비판」,장로회신학대학 석사학위,1994. 정현영,「아모스의 경신례 비판-관련 구절을 중심으로」,가톨릭대학교 학사학위,1995.




2.3 기타




설교를 위한 주석서, 그룹 및 개인용 성경공부교재, 성경연구시리즈 그리고 성경강해용 등으로써의 아모스서에 대한 자료가 있다. 전기완,『아모스 강해』(서울:기독교대한감리회총리원전도국,1961). 김희보,『舊約 아모스 註解』(서울:총신대학출판부,1984). L. F. Church(박근용 역),『에스겔,다니엘,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나훔,하박국,스바냐,학개,스가랴,말라기』(서울:기독교문사,1986). J. Ulpendale(장귀복 역),『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댜』(서울:기독교문사,1988). 윤기현,『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서울:풀빛,1988). 金景行,『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서울:성서연구사,1991). H. Doug․H. Doris(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편집부 편역),『요나,요엘,아모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서울: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1992).


이외에도 소설 아모스가 있다. H. Koch(조성노 옮김),『(아모스의 이야기)사자가 표효할 때』(서울:혜선출판사,1988). H. Koch(조성노 옮김),『청정한 예언자의 육성: 아모스 상권』(서울:현대신학연구소,1994). H. Koch(조성노 옮김),『청정한 예언자의 육성: 아모스 하권』(서울:현대신학연구소,1994).




3. 아모스서의 이해




3.1 시대적 배경3)




3.1.1 정치․경제․사회적 상황


북부 이스라엘에서 국가가 백성들에게 재정상으로 혹은 그밖의 방법으로 어떠한 부담을 짊어지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천한 백성의 신세는 터무니없이 고달팠다. 아모스가 알려주듯이, 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병폐는 언어도단의 극심한 부정불의와 어이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였다. 영세농민의 경제적 사정은 겨우 연명이나 할 정도였는데, 그 운명은 흔히 고리대금업자의 처분대로 좌우되었으며, 조금이라도 재난을 만나는 경우-예컨대 한발이나 농작물의 흉작(아모 4,6-9 참조)-종노릇을 하지 않으면 저당권 행사를 당하거나 축출당하기가 일쑤였다. 체제 자체가가혹했지만 부자들의 탐욕으로 더욱 가혹해졌으며, 부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가난한 자들의 곤경을 무자비하게 이용했고, 흔히 가장 교활한 사기 수단을 쓰거나, 가짜 도량형기를 만들거나 여러가지 법적 속임수를 써서 자기네 목적을 달성하곤 했다(아모 2,6f; 5,11; 8,4-6). 이렇게 부정직한 관습이 도처에서 성행하고 있었지만, 재판관들이 돈으로 매수되기 쉬웠으므로(아모 5,10-12), 가난한 자들의 구제책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재산을 강탈당하고 토지에서 쫓겨나는 가난한 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이 무렵에 이스라엘의 사회구조가 근본적 체질변화를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은 원래 야훼와의 계약으로 형성된 하나의 부족동맹체였다. 비록 초기에는 무법과 폭력의 사례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사회구조는 계급차별이 없는 일매진 체제였고, 모든 사회적 의무의 근거는 야훼와의 계약에서 비롯했으며, 모든 분쟁은 계약의 법에 따라 판결되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변해버린 것이다. 왕정이 등장하고, 거기에 따라 백성들의 생활이 왕권의 지배하에 조직화됨으로써 사회적 의무의 실제 근거는 국가로 옮아갔고, 또한 이와 더불어 상업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특권계급이 생기니 부족의 유대는 약화되고 부족사회의 주요 특징인 연대적 단결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수많은 가나안 사람들이 흡수되었으나 이들은 지파조직 안에 통합되지도 않고 그 출신배경이 봉건적이었으므로, 이를테면 이스라엘 안에 계약이나 계약의 법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특수한 주민집단이 편입된 셈이었다. 이러한 풍조들은 이미 다윗과 솔로몬 때부터 시작된 추세였지만, 그동안 항의와 혁명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억제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었다. 8세기에 와서는 비록 야훼신앙이 그런대로 국가 종교로 남아 있어서 사람들이 입술로는 야훼의 계약을 믿는다고 했지만, 계약의 법은 실제적으로 거의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사회는 그 부조전래(父祖傳來)의 생활바탕을 상실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생활양식에 쉽게 순응하지도 않았다.




3.1.2 종교적 상황


북부 이스라엘의 사회적 분해는 종교적 부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큰 신당들은 예배자들이 모여들어 분잡했고 또 아낌없는 물량지원도 받았지만(아모 4,4f; 5,21-24), 순수한 고유의 야훼신앙은 이미 유지되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방의 신당들 중에는 확실히 공공연하게 이교적 색채를 띤 것이 많았고, 추잡한 의식을 거행하는 풍산제의가 도처에서 성행하였다(호세 1-3장; 4,6-14). 사마리아 오스트라카(手記用 土器片들)에 적혀 있는 이름들 중, “야훼”란 말과 복합된 이름들과, “바알”이란 말과 복합된 이름들의 수가 거의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이름들에 복합된 바알(“주인”)이란 말은 단지 야훼의 칭호에 지나지 않을 경우도 있었겠지만(호세 2,16), 어쨌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의 숭배자였다는 결론을 피할 수는 없다(같은 시대의 유다에서는 그때까지 그런 이름들이 ‘전혀’ 엿보이지 않고 있다!).


야훼신앙이 이렇게 그 효력이 희미해진만큼, 계약의 법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거나 혹은 그 위반을 효과적으로 비난하기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지방 신당들의 제관들은 아예 이교도가 되었거나 아니면 반(半)이교도나 다름없었으니, 확실히 그런 도전적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제의(國家祭儀)의 성직자들에 관해 말하더라도, 그들은 그런 이교화의 풍조를 명백하게 비난하는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장려하는 말도 전혀 할 수 없었던 관리이거나 신분높은 귀족층이었다(아모 7,10-13). 더욱 놀라운 것은, 과거에는 야훼의 이름으로 국가에 항거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예언자 집단에서도 효과적인 비난의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은 듯한 사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기존질서에 완전히 굴복했던 것 같다. 사실 그들은 한 집단으로서 공통적으로 깊이 부패하여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가 되었으니, 말하자면 주로 보수(報酬)에만 관심을 가진 직업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서 널리 멸시의 눈초리를 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아모 7,12; 미카 3,5.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비록 썩기는 했지만 그 전체적 분위기에는 낙관주의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이 내적으로 왜곡되어 나쁜 길로 빠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役事)한 야훼의 은혜로운 행적은 틀림없이 제의(祭儀)에서 부지런히 암송되었고 또한 이스라엘이 구분과 맺은 계약도 정기적으로 재확인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행위는 장래에도 언제나 야훼가 국가를 보호해 준다는 보증으로 생각된 것 같고,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의 호의와(아모 2,9-12) 계약의 약정으로 자신들에게 부과된 의무들을 이미 대부분 잊어버리고 있었다(아모 3,1f; 9,7). 미래에 관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의 날의 도래를 믿고 있었다. 이러한 개념은 아모스서 5,18-20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이미 8세기에는 확고히 뿌리를 내린 대중적인 희망이었는데, 그 기원은 분명치 않다. 아마 사람들이 과거에-즉, 출애급, 가나안 정복, 판관들의 성전 등에-야훼가 친히 개입했던 그 위대한 구원시대의 전승들을 상기함에 따라, 야훼가 다시 이스라엘을 위해 결정적으로 개입하여 그 원수들을 쳐부수고, 선조들에게 약속되었던 가나안 땅의 점유를 확고히 보장하리라는 기대가 부풀어올랐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직 그 규범적 신앙의 본질적인 특징들-곧 선택, 계약, 약속 등-에 집착하고는 있었지만, 그 신앙은 내적으로 깊이 왜곡되어 변질하고 있었다. 야훼신앙은 이제 어떤 이교나 다름없는 종교로 변할 위험상태에 처해 있었다.




3.2 드고아의 목자인 아모스4)




아모스5)의 이름이 들어 있는 예언서는 그에 대한 전기라기보다 예언자가 전한 “야훼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다만 후대의 어는 편집자가 덧붙인 아모스 예언서의 표제(아모 1,1)를 보면, 아모스가 예루살렘에서 몇마일 떨어진 드고아의 목자 출신으로서,6) 유다의 우찌야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에 활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지진이 있기 바로 이 년 전”(즈가 14,5 참조)이란 연대만 밝힐 수 있다면 그가 활동한 시대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쨋든 아모스는 여로보암 2세(786-746)의 통치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에 북부왕조에서 활약했다. 그의 활동연대를 기원전 750년경으로 잡으면 아모스서에 반영된 여러 가지 조건과 잘 부합된다.


아모스와 베델성전-여로보암 1세가 북부왕조의 국가성소로 세웠던 왕실성소 중 하나-의 주임사제인 아마지야(Amaziah)의 극적인 상봉을 다루고 있는 산문인 7,10-17에 아모스의 출신배경이 분명히 나와 있다. 여기서 아모스는 유다 출신으로서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였다고 한다. 남부 출신의 예언자가 북부왕조에 나타난 사실을 보면,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은 정치적인 것으로써, 이 두 왕국이 공통의 종교적 전승에 의해 여전히 하나의 계약 백성으로서의 유대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지야는 아모스가 예언을 하여 먹고 사는 또 하나의 직업 예언자(1사무 9,8; 1열왕 14,2; 2열왕 8,8)인 줄 알고, 유다로 돌아가 거기서 “밥을 벌어 먹어라”고 경고했다. 여기서 아모스의 대답은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이렇게 번역해야 할 것이다.7)




나는 예언자(איבנ)가 아니요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요


돌무화과 재배자다.


그러나 야훼께서 양떼 뒤에서 나를 데려다가


“거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말씀하셨다(아모 7,14-15).




아모스는 자기 자신을 איבנ(예언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야훼께서 당신 백성에게 경고를 내리기 위해 예언자들을 세운 것을 알고 있었다(2,11; 3,7). 그는 자기 자신을 나단, 엘리아, 미가야 같은 예언자들과 비슷한 신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당대의 직업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평신도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임무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나섰다는 것이다(3,8 참조). 다시 말하면 그의 임무는 직업 예언자들의 예언과는 색다른 유형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모스는 기록으로써 우리에게 전해진 신탁을 전한 최초의 예언자다. 아모스보다 앞선 엘리야와 엘리사의 말이나 행적은 기억에 의해 전달된 구전전승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모스부터 그의 책표제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그가 본 말씀”을 직접 기록한 전승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모스 예언서는 예언자가 여기저기서 말한 “신탁들” 또는 작은 단위들을 편집해 놓은 것이다. 이 편집은 아모스가 직접했거나 아니면 아모스의 신탁들을 소중히 간수했던 예언자들이 했을 것이다. 아모스는 베델(7,13) 그리고 사마리아(4,1)에서 설교하던 짧은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이 신탁들을 전했다. 그가 메시지를 던진 곳은 주로 북부왕조였으나,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매왕국인 유다도 염두에 두었다(6,1.2; 8,14). 말하자면 “야훼께서 에집트에서 불러낸 온 가족”(3,1) 전체에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아모스가 계약전승에 뿌리박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야훼의 보편적 주권을 강조한 점에서다. 그가 보다 강력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신명 26,5-9; 여호 24,2-13)을 되뇌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준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기억에 비추어 현재의 위기를 가늠하듯이, 아모스도 야훼의 백성에 특별한 임무와 운명을 짊어지게 한 과거의 공통적 기억에 비추어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를 해설하였다. 아모스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구출하고,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족의 땅”을 정복하여 차지하게 하고, 예언자와 나지르인을8) 세워 자기네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게 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아모스는 모세 전승의 열렬한 수호자였다. 그는 과거와, 그리고 당시 북부왕조와 남부왕국의 국가적 서사시(J와 E)에 뿌리깊이 박혀 있던 확고한 신념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에 대한 견해는 아모스와 일반 백성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야훼의 이스라엘 선택에 관한 견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모스의 예언요지가 3,1-8에 나와 있는데, 이 구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인 에집트에서의 구출을 상기시키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온 가족”이 종교적 충절이라는 유대로 뭉치게 된 것은 바로 이 사건을 주도한 야훼의 덕분이었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관계를 맺은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 즉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와 야훼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계약 문구는 계약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확신에서 아모스와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자만심에 빠져, “그러니까 야훼께서 번영과 승리와 만방에서의 우위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떠벌였다. 결국 그들은 자기네들의 임무는 제쳐두고 계약갱신 의식을 통해 야훼의 축복만 바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소명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변의 어는 민족보다도 이스라엘을 더욱 비난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또 역사적인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악행을 감추기 위해 빛보다 암흑을 택했다. 그래서 아모스는 “야훼의 날”이 멸망의 날이 되리라고 예고했다.




3.3 연대9)




아모스는 기원전 760-750년 동안에 또는 대략 그 즈음의 시기에 활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10) 그런데 대체로 이 추정은 아모스가 베델을 방문한 것이 여로보암 2세의 치정 때였음을 시사하는 7,10에 근거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승인된 연대표에 따르면 이 왕은 746년에 죽었다. 그러나 이 연대 추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구약성서 연대학이라는 어려운 분야에서 기껏해야 추정에 머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841년에 예후가 샬마네셀 3세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증언하는 아시리아 기록 문서의 뚜렷한 연대를 토대로 여로보암 2세의 사망 연대를 산정해 볼 수 있다. 아시리아 문서가 말한 이 조공을 예후가 통치를 시작한 때 바친 것으로 일단 가정하고, 열왕기 하권의 기록에 따라 예후 뒤를 이은 왕들의 통치 연한을 합산해 보면, 예후의 즉위로부터 102년 후에 여로보암 2세가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곧 이 계산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739년에 죽은 셈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모스가 예언의 소명을 받은 것은 “유다왕 우찌야의 시대 … 그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이었다는 글이 아모스서 첫머리에 실려 있다. 베그리히(Begrich)는 우찌야의 죽음을 기원전 747년으로 추정하는가 하면 올브라이트는 그보다 늦게 742년으로 잡는다. 그러나 만일 아자리야라고도 불리운(2열왕 15장) 우찌야가, 디글랏빌레셀 3세의 서방 정복 운동이 한창이던 때 북시리아에서 활약하던 야우디의 아즈리아우(Azriau of Yaudi)와 동일한 인물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739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한편 아모스서 첫머리에 언급된 지진은 요세푸스가 우찌야의 통치에 관한 기술 속에 언급한 지진과 동일한 것으로 추측된다. 요세푸스는, 우찌야가 사제들의 제지를 무시한 채 성전에서 분향을 하자 지진이 발생하였으며 그로 인해 우찌야는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만일 실제로 문제의 지진이 우찌야가 문둥병에 걸린 바로 그 시기에 발생하였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그의 통치가 막바지에 이른 때, 곧 740년 경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모스가 소명받은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기원전 742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3.4 아모스서의 구성과 형성 과정11)




예언서에 대한 연구는 1870년대 모세오경에 대한 문학비평과 해석의 방법이 성공을 거둔 이후 부수적으로 발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언서의 연구에 있어서 관심을 지니고 집중적인 연구와 조사를 한 최초의 학자들은 Abraham Kuenen, Bernard Duhm 그리고 Julius Wellhausen이었다. 그들은 세가지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여 그들의 연구를 개진하였다. 첫번째 그들이 관심을 지녔던 것은 예언자 개인의 인격과 경험이었다. 인격은 예언자의 인간적 측면에 대한 연구이고 경험은 그들을 역사적 맥락하에서 탐구해보자는 것이었다. 둘째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예언자가 옹호한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예언자들은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고 국가의 멸망을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비행과 위선적 종교행위를 비판하였다. 예언자들은 다신교와 이교적인 요소가 혼합된 경신례와 윤리적 타락, 율법의 위배, 불의의 만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등에 대해 냉혹한 심판을 하였으며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이상주의를 제시하였다. 세째 관심의 대상으로  여겨진 것은 예언서의 원본성이다. Duhm은 아모스서 중 2,4-5; 4,13; 5,8-9; 9,5-6의 원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고, Wellhausen은 이에 1,9-12; 3,1-4b; 5,26; 6,2; 8,6; 8,11-12; 9,8-15를 첨가시켰다. 이에 George Adam Smith는 ① 유다에 대한 언급인 2,4-5; 3,1b; 6,1; 9,11-12 ② 송영시 부분 4,13; 5,8-9; 9,5-6 ③ 낙관적 종말부분 9,8-15 ④ 역사, 언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텍스트로써 그 원본성에 의심이 가는 곳으로 1,2.6-12; 3,7.14b; 5,26; 6,2.14; 8,11-14 ⑤ 여러 설명들과 해설들 2,10.12.14-15; 3,1.3; 4,7-8.10; 5,6.13.16.22; 6,9-11a; 8,6.8.13 등의 원본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그들은 자서전적인 7,10-17 부분도 표제인 1,1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과 같이 후대에 첨부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예언서에 대한 제2세대 연구가들은 Hermann Gunkel, Hugo Gressmann 그리고 Sigmund Mowinckel이었다. 이들은 종교사학파로 알려져 폭넓은 예언서 연구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세계 내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들과 종교 문학의 조명 아래에서 구약성서의 종교와 문학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였다. 그들이 특히 관심을 지닌 것은 고대 근동지방과 헬레니즘 문화였다. 좀더 좁게 말하면 그들은 형식비평이나 양식사(Gattungs geschichte)의 전망 속에서 예언 문학과 예언을 분석하려 하였다. 그들은 Wellhausen과 문학비평가들의 연구가 역사적 바탕이 없다하여 비판하였다. 그러나 Gunkel과 다른 사람들은 학자는 자료가 문학적 단계를 형성하기 이전의 모습을 탐구해야 하며 이 탐구는 그 자료의 원모습과 전술된 형태를 밝히고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예언서 연구에 있어서 제3기는 독일의 신학자 Albrecht Alt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Gunkel 뿐만 아니라 사회학자인 Max Weber 그리고 신정통 신학자인 Karl Barth의 영향을 받았다. Weber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야훼에 대한 계약의 동의와 계약의 법에 의해 서로 결속된 부족 연맹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Weber에 따르면 예언자들은 부족동맹의 오래된 계약법 전통에 기초하여 가르치고 설교하였던 사람들이었다. Barth의 하느님 말씀신학은 말씀의 초월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말씀은 직접적인 대결 구도 속에서 인간들을 만나고 있는데, 이는 성서 예언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모델로써 제공되고 있다. Martin Noth은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였고 Gerhard von Rad은 이스라엘 종교와 신학을 주석했는데, 신과 인간의 계약에 대한 개념들과 이스라엘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들 그리고 성서주석의 핵심이 되는 계약법의 역할들을 다루었다. 이 모든 것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례와 전례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몇몇 예언자들은 예언과 제례를 공식적으로 담당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모스 역시 이스라엘의 평화와 구원의 협조자, 즉 제례의 집전자로서의 성격과 하느님의 신학을 전하는 심판의 예언자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와 연구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폭넓고 다양하게 전개되어 나타난다.12)


아모스서의 전체적 구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R. Gordis는 아모스서는 두 부분(7,10-17; 8,4-14)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모스서를 회개와 구원의 희망을 내용으로 하는 1,1-7.9와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 8장 이하에서 끝까지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첫부분 예언의 효능은 아마지야가 아모스를 축출했을 때 이미 사라져 버린 셈이 되었고, 둘째번 예언의 심판이란 북조 이스라엘은 멸망에 이르게되고 남조 유다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13) Hyatt는 이 책의 대부분이 기원전 8세기 예언자의 작품으로 간주했으나, 4,13; 5,8; 9,5-6.11-15 등은 욥과 제2이사야서의 사상과 일치된다고 보고 이 부분들을 후대 첨가물로 파악했으며 2,4-5 부분도 원문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4)


J. L. Mays는 이야기를 발설한 화자에 촛점을 맞추어 아모스서는 주로 세가지 형태의 자료층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첫번째 형태의 자료층은 예언자가 그의 임무 수행시 발설한 언명들, 둘째는 예언자가 1인칭으로 발설한 이야기들, 셋째는 3인칭 화자가 예언자에 대해 발설한 이야기들이다. 1장 3절부터 6장 14절까지는 예언자가 발설한 언명들이고, 예언자가 1인칭으로 발설한 이야기인 네개의 환시 보고는 7,1-3.4-6.7-9; 8,1-3이며 세번째와 네번째 환시보고 사이에 3인칭 화자가 예언자에 대해 발설한 이야기 7,10-17이 삽입되어 있다. 8,4-14에서 다시 예언자의 언명이 이어지고, 다섯번째의 1인칭 환시보고가 9,1-6까지 이어지며 마지막 결론 부분(9,7-15)은 예언자의 언명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와같이 세가지 형태의 자료들만이 이 책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표제 부분(1,1)과 송영시 부분(1,2; 4,13; 5,8f; 9,5f; 8,8?) 그리고 지혜문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보고(5,13) 등은 다른 자료로부터 온 것이다. 아모스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자료들은 분명 예언자 아모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책의 최종 형태는 아모스로부터 최소한 포로기까지에 이르는 동안의 긴 형성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15)


Mays는 이어서 아모스의 전기를 알고 있던 그의 제자들이 7장 10-17절의 내용을 삽입시켰으며, 띠로(1,9-10), 에돔(1,11-12), 유다(2,4-5)에 대한 신탁은 포로기의 상황을 반영하며 신명기계의 견해와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또 송영 부분은 유다의 제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5장 13절의 보고는 지혜문학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책의 마지막 부분인 구원의 신탁(9,11-15)은 아모스의 시대의 상황과 다른 것으로 포로기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깨어진 공동체가 하느님의 완전한 권고를 들도록 첨가된 것이다.


A. Weiser는 아모스서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나를 주어로 하는 문체로 된 이야기, 둘째는 본래 7장 10-17절에서 끝난 신탁들의 모임인 1-6장이다. 그는 아모스 자신의 글인 그의 사건에 관한 원래의 기록(7,1-9; 8,1-3; 9,1-4)과 이스라엘에 임한 심판에 의한 신탁(1-6장)의 두 문서들이 여러 차례 확대과정을 거친 후에 포로기나 포로기 후에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 것 같다고 보았다.16)


서인석은 세부분으로 크게 구분짓는다. 첫째 부분(1-2장)은 표제(1,1)와 서문(1,2)으로 시작하고 있다. 내용은 이방백성에 대한 7개의 신탁과 이스라엘을 거슬러 발한 긴 문학단위(2,6-16)가 정점이 되어 끝을 맺고 있다. 둘째 부분(3-6장)은 예언자의 중심적 신탁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마리아와 그 지도계급에 대한 어록이 수집되어 있다. 셋째 부분(7-9장)은 예언자가 체험한 5개의 환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몇 개의 단죄신탁과 구원신탁이 첨가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7)


H. W. Wolff는 아모스서를 아모스 자신과 당대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 개의 기원전 8세기 문서층과 후대의 해석으로 여겨지는 다음 세기의 문서층이 결합된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는 드고야 출신 아모스의 말들(1,1a)의 수집인 3-6장으로 된 전승군을 중심으로 예언자 자신에게 소급되는 일단의 예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이 일단의 기록이란 외국에 대한 신탁(1,3-2,16)과 자서전적인 성격의 환시(7,1-8; 8,1-2; 9,1-4)를 말한다. 그는 이 두개의 전승군이 기원전 735년 유다에서 활동한 “고대 아모스 학파”에 의해 결합되었고, 여기에 여러 구절들이 보충되었다(1,1b; 5,5a.13-15; 6,2.6b; 7,9-17; 8,3-14; 9,7.8a.9-10). 이후 요시아 시대(B.C. 639-609)의 “벧엘성소에 대한 설명”(1,2; 3,14b; 4,6-13; 5,6.8-9; 9,5-6), 포로기의 “신명기사가들의 편집”(5,25-26; 6,1; 8,11-12?) 그리고 유배이후의 “구원의 종말론”(5,22a; 6,5; 9,8b.11-15) 등의 과정을 통한 첨부와 가필에 의해 현재 아모스서의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련된 아모스의 독특하고 어두운 메시지는 모든 전통의 충돌을 거치면서 확실하게 들을 수 있도록 그 구조가 완결되게 되었다. 확실히 한 예로써 고대 아모스학파는 구원에 대한 제의를 통한 희망(5,14-15)을 수정토록 하였으며, 벧엘성소에 대한 설명과 신명기역사가들의 편집은 기원전 6-7세기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아모스가 한 말에 대한 새로운 관련성을 파악하였다. 이에 유배 이후의 신학이 간결하나마 명백하게 첨가되어 야훼의 사형언도는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아니라는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희망의 언명으로 변화되었다.18)


Coote는 편집비평의 관점에서 아모스서의 구성과 신학을 다루었다. 그는 아모스서는 세 단계의 편집을 거쳐 완성되게 되었는데, 매 단계마다 편집의 신학적 내용이 다르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편집이란 후대의 편집자가 원래의 내용에 후대의 편집물을 단순히 삽입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본문에서 쓰여진 언어가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면서 당대의 새로운 상황과 연결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마리아 멸망전인 8세기 중반 첫시기는 “아모스의 편집”시기로써-아모스 자신이 첫번 기록자라는 것은 의심스럽지만-죄의 선고와 재앙을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2,6b-8; 3,9-12; 4,1-3; 5,1-2.11.12b; 11,12b.16-18; 6,1-7.8a.11; 8,4-7.9-10; 9,1b-4a). 둘째 시기는 “벧엘 편집자”에 의해 기원전 7세기 히즈키야와 요시아 혹은 조금 후대인 여호야킴왕 사이의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 강조점은 훈계로써 선택을 권고하고 제안하였다(1,1-2.3-8; 1,13-2,3; 2,6-3,8; 3,9-6,14; 7,1-9,6). “최종 편집자”에 의해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셋째 시기는 포로 말엽 혹은 그 직후에 이루어졌으며 구원신탁의 완성을 약속하고 있다(1,9-12; 2,4-5; 9,7-15).19)


Blenkinsopp는 아모스서의 편집역사가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제2성전시기에 예루살렘에서 최종 편집이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아모스서와 요엘서의 유사성(메뚜기 재앙, 야훼의 날, 우주적 대혼란, 기적적 풍요의 약속 등)을 지닌 이유에 착안해서 야훼께서 성전에 계시다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두 책이 의도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제목(1,1), 유다신탁(2,4-5), 이스라엘 고대전승(2,9-12), 이스라엘 선택사상(3,1-2), 예언자에 관한 관심(3,7) 등은 신명기 역사학파의 영향이며 벧엘성소에 관한 언급(5,6)은 포로후기 제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았다.


Auld는 Coote가 세 시기로 구분짓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태도라고 말하며 Koch의 네단계 구성을 소개한다. Koch는 아모스서는 1-2장; 3-4장; 5,1-9,6; 9,7-15의 네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고 5,1-9,6은 5,1-8.9-17; 5,18-27; 6,1-14; 7,1-8.13; 8,4-9,6의 여섯 항목으로 구분되는데 이 각부분들은 “들으라”는 공식구로 시작되며 송영으로 끝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20)


Auld는 희랍어역본에는 3,10; 6,8.14절에 “야훼의 신탁”이란 용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Koch의 주장이 약화된다고 보며, 둘째와 셋째 부분의 결론인 4장 13절과 9장 6절이 송영이라는 것은 송영을 단지 항목의 결론으로만 취급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제시된다고 보고 있다. 또한 4,6이하의 재난선포는 곧이어 5장 1절의 처녀 이스라엘의 패망과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 그 중간에 송영이 끼였다고 해서 5장이하가 새로운 단원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Auld는 이에 덧붙여 아모스서의 구성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사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1)


편집과 전승의 차원을 떠나 내용을 중심으로 아모스서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열방의 신학:              1,1-2,16


    ② 이스라엘에 관한 심판신학: 3,1-6,14


    ③ 세 개의 환시: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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