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四君子 – 매란국죽(梅蘭菊竹))[2004/2/6 복음(마르꼬 6,14-29)묵상]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복음(마르꼬 6,14-29) 그 때에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하고 말하는가 하면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 왕이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요인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 주마.” 하고는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소녀가 나가서 제 어미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의논하자 그 어미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하고 시켰다.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다 장사를 지냈다. 묵상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사군자(四君子 – 매란국죽(梅蘭菊竹)) 생각이 나더군요. 매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고고한 품격의 매화, 깊고 그윽한 높은 인격의 향을 풍기는 아름다움의 난초, 늦가을 서리 속에 피어 더없이 아름다운 향을 뽐내는 지조 높은 국화, 추운 겨울에도 그 푸르름과 꼿꼿함을 잃지 않는 절개의 대나무… 더군다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자니 대나무의 꼿꼿함이 더더욱 생각이 납니다. 생(生)을 지내다보면 내 자신의 안위를 위해 피해가고 싶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잘 피해가면 편할 수 있는데…’ ‘지금 이 순간 조금만 아부하면 날 잘 봐줄텐데…’ 언제인가 친구가 제게 이런 말 한적이 있습니다. “넌 말하는게 너무 교과서적이야.” 저는 그 말에 너무나도 큰 고민에 빠졌더랬습니다. ‘내가 그만큼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내가 위선적이란 얘기일까?’ 그 후부터는 웬지 친구에게 말을 할 때 조심스러워지더군요. 함부로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그 친구 만나면서 ‘그래, 지금 이 순간 눈 질끈 감는거야. 벙어리, 귀머거리 되는거야.’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요. 그 친구가 잘못하는 것을 뻔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도 저는 그 친구 하는 말이나 짓에 그냥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 스스로 사군자같은 품성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 친구 하는 말에 상처도 안받았을 것이고, 그 친구가 나쁜 길로 빠져드는 데에 그렇게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어처구니 없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단지 바른 소리 잘 한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명도 ‘바른 소리 잘 한다는 것’이었죠. 요즘 세상에 바른 소리 잘 하다가 손해 입는 모습 보면 ‘멍청한 녀석’이라며 핀잔을 줍니다. 그냥 대충대충 살지 뭐 그리 꼿꼿이 사느냐면서 삿대질 하죠.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삿대질을 하며 ‘멍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함께 웃으며 기뻐해주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바른 소리로 교훈을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친구의 모습일 것입니다. 남이 잘 되면 배 아파하고, 남이 잘못되면 욕을 하거나 고소해하는 모습… 그런 모습이 지금의 우리들이 아닐런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융통성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융통성이 지나쳐서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붓을 들고 사군자를 쳐봐야되겠습니다. Written by Paulus
사군자(四君子 – 매란국죽(梅蘭菊竹))[2004/2/6 복음(마르꼬 6,14-29)묵상]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복음(마르꼬 6,14-29) 그 때에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하고 말하는가 하면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 왕이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요인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 주마.” 하고는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소녀가 나가서 제 어미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의논하자 그 어미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하고 시켰다.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다 장사를 지냈다. 묵상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사군자(四君子 – 매란국죽(梅蘭菊竹)) 생각이 나더군요. 매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고고한 품격의 매화, 깊고 그윽한 높은 인격의 향을 풍기는 아름다움의 난초, 늦가을 서리 속에 피어 더없이 아름다운 향을 뽐내는 지조 높은 국화, 추운 겨울에도 그 푸르름과 꼿꼿함을 잃지 않는 절개의 대나무… 더군다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자니 대나무의 꼿꼿함이 더더욱 생각이 납니다. 생(生)을 지내다보면 내 자신의 안위를 위해 피해가고 싶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잘 피해가면 편할 수 있는데…’ ‘지금 이 순간 조금만 아부하면 날 잘 봐줄텐데…’ 언제인가 친구가 제게 이런 말 한적이 있습니다. “넌 말하는게 너무 교과서적이야.” 저는 그 말에 너무나도 큰 고민에 빠졌더랬습니다. ‘내가 그만큼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내가 위선적이란 얘기일까?’ 그 후부터는 웬지 친구에게 말을 할 때 조심스러워지더군요. 함부로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그 친구 만나면서 ‘그래, 지금 이 순간 눈 질끈 감는거야. 벙어리, 귀머거리 되는거야.’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요. 그 친구가 잘못하는 것을 뻔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도 저는 그 친구 하는 말이나 짓에 그냥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 스스로 사군자같은 품성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 친구 하는 말에 상처도 안받았을 것이고, 그 친구가 나쁜 길로 빠져드는 데에 그렇게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어처구니 없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단지 바른 소리 잘 한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명도 ‘바른 소리 잘 한다는 것’이었죠. 요즘 세상에 바른 소리 잘 하다가 손해 입는 모습 보면 ‘멍청한 녀석’이라며 핀잔을 줍니다. 그냥 대충대충 살지 뭐 그리 꼿꼿이 사느냐면서 삿대질 하죠.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삿대질을 하며 ‘멍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함께 웃으며 기뻐해주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바른 소리로 교훈을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친구의 모습일 것입니다. 남이 잘 되면 배 아파하고, 남이 잘못되면 욕을 하거나 고소해하는 모습… 그런 모습이 지금의 우리들이 아닐런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융통성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융통성이 지나쳐서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붓을 들고 사군자를 쳐봐야되겠습니다. Written by Paulus
복음(마르꼬 6,14-29)
그 때에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하고 말하는가 하면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 왕이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요인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 주마.” 하고는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소녀가 나가서 제 어미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의논하자 그 어미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하고 시켰다.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다 장사를 지냈다.
묵상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사군자(四君子 – 매란국죽(梅蘭菊竹)) 생각이 나더군요. 매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고고한 품격의 매화, 깊고 그윽한 높은 인격의 향을 풍기는 아름다움의 난초, 늦가을 서리 속에 피어 더없이 아름다운 향을 뽐내는 지조 높은 국화, 추운 겨울에도 그 푸르름과 꼿꼿함을 잃지 않는 절개의 대나무… 더군다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자니 대나무의 꼿꼿함이 더더욱 생각이 납니다.
생(生)을 지내다보면 내 자신의 안위를 위해 피해가고 싶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잘 피해가면 편할 수 있는데…’ ‘지금 이 순간 조금만 아부하면 날 잘 봐줄텐데…’
언제인가 친구가 제게 이런 말 한적이 있습니다. “넌 말하는게 너무 교과서적이야.” 저는 그 말에 너무나도 큰 고민에 빠졌더랬습니다. ‘내가 그만큼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내가 위선적이란 얘기일까?’ 그 후부터는 웬지 친구에게 말을 할 때 조심스러워지더군요. 함부로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그 친구 만나면서 ‘그래, 지금 이 순간 눈 질끈 감는거야. 벙어리, 귀머거리 되는거야.’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요. 그 친구가 잘못하는 것을 뻔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도 저는 그 친구 하는 말이나 짓에 그냥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 스스로 사군자같은 품성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 친구 하는 말에 상처도 안받았을 것이고, 그 친구가 나쁜 길로 빠져드는 데에 그렇게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어처구니 없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단지 바른 소리 잘 한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명도 ‘바른 소리 잘 한다는 것’이었죠. 요즘 세상에 바른 소리 잘 하다가 손해 입는 모습 보면 ‘멍청한 녀석’이라며 핀잔을 줍니다. 그냥 대충대충 살지 뭐 그리 꼿꼿이 사느냐면서 삿대질 하죠.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삿대질을 하며 ‘멍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함께 웃으며 기뻐해주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바른 소리로 교훈을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친구의 모습일 것입니다.
남이 잘 되면 배 아파하고, 남이 잘못되면 욕을 하거나 고소해하는 모습… 그런 모습이 지금의 우리들이 아닐런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융통성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융통성이 지나쳐서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붓을 들고 사군자를 쳐봐야되겠습니다.
Written by Pau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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