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니야(הꖷꘁꘪꙃ)
1. 인물
2. 시대
3. 형성과 구성
4. 스바니야의 주요 메시지
4.1 야훼의 날
4.2 남은 자
4.3 가난한 자
4.4 겸손한 자
4.5 구원약속
5. 가치
1. 인물
구약성경에는 본 선지자 스바니야 외에 두 명의 다른 스바니야가 언급되어 있다. 한 사람은 크핫 족속으로서 노래부르는 자 헤만의 조상이요(1역대 6, 36), 또 다른 사람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로서 친에집트파 제사장이다(2열왕 25, 18). 어원적으로 스바니야(הינפצ)라는 이름은 ‘야훼가 숨기신 자 또는 보호하신 자’(참고 시편 27, 5)를 뜻하는데 이것은 그의 메시지에 특별히 잘 어울리는 의미이다.1)
스바니야는 나훔, 하바꾹과 더불어 요시아 시대에 활동하던 예언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인물에 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은 없으며, 1장 1절의 족보는 다른 예언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4대 조상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Fohrer는 맨 위의 이름이 남왕국 유다의 먼 왕족에 속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의 아버지가 유다 사람이 아니고 에디오피아인 구시이기 때문에 흔한 왕족 이름인 히즈키야가 그의 조상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스바니야는 예루살렘 거주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스바 1, 10). 그리고 스바니야가 제의의 순결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제사장이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도 할 수 있으나 확정하기는 힘든 일이다. Blenkinsopp는 스바니야의 반(反)아시리아 신탁(2, 13-15)과 나훔과의 유사성으로 미루어 보아 스바니야가 한때 성전 직원이었을 것이라고 본다.3)
2. 시대
스바니야의 서문(1, 1)은 예언자 스바니야의 활동 시기를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주전 7세기의 고대 근동 세계는 아시리아의 전성기였다. 유다의 히즈키야를 새장 안의 새처럼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며 그 성안에 가두어 두었던 산헤립은 주전 681년에 살해되고, 그 후계자 에살핫돈이 아시리아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이집트 정복에 나섰다. 에살핫돈은 몇 차례의 이집트 정복 시도 끝에 종래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아들 앗슈르바니팔이 주전 663년에 이집트의 고도 테베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에 유례없는 대제국을 형성하여 이집트의 조공을 받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 무렵 유다는 므나쎄가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조공을 바침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므나쎄는 주전 687년 아버지 히즈키야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되면서 아버지의 외교 정책과는 정반대로 친아시리아 노선을 펴게 된 것이다. 신명기 사학파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므나쎄 때문이라고 말한다(2열왕 23, 26-27). 열왕기 하 21장 1-18절에는 므나쎄가 히즈키야가 파괴한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 메소포타미아의 점성 예배를 도입하며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점치며 사술을 행하여 신접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야훼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케 했다”(21, 6)고 적고 있다. 므나쎄는 또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기도 하였다(21, 16).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정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친아시리아 정책을 비판하는 야훼 신봉자들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므나쎄의 후계자 아몬은 2년만에 피살당하고, 아몬의 어린 아들 요시야가 8세에 유다 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640-609년).4)
요시야 초기의 국제정세는 대제국 아시리아가 붕괴의 위협을 받는 때였다. 한때는 아시리아의 종속국이었던 바빌론과 이집트가 아시리아의 멍에를 벗어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Bright는 이 무렵 아시리아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며 무엇보다도 아시리아에 큰 타격을 준 것은 북방 코카스 지역에서 내려온 야만인 스키타이족이라고 본다.5) 이들은 팔레스타인 일대를 휩쓸어 이집트까지 진입하였으며, 이집트의 삼메티쿠스 1세가 뇌물을 주어 그들을 되돌려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6) 그러나 Fensham은 삼메티쿠스 시절 스키타이족이 침입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본다. 스키타이 가설은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처음 제시한 것이긴 하나 증빙 자료가 전무한 편이라고 보아 최근에는 그 가설이 부정되고 있다고 본다.7)
Newsome은 스바니야의 활동은 요시야의 종교개혁(B.C. 621) 이전일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스바니야서가 반영하는 사회적이고 영적인 상태가 개혁 이후보다는 개혁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8) Newsome은 일반적으로 스바니야는 스키타이의 침공이 예언활동의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즉 스바니야는 스키타이의 파괴는 유다의 죄 때문에 야훼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9) 그러나 본문에는 스키타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Fensham은 예루살렘에 혼합종교가 성행하고(1, 4-5), 왕족이 외국 옷을 입으며(1, 8), 모압과 암몬이 유다를 경멸하는 것(2, 8) 등은 니느웨가 아직 멸망되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스바니야의 예언이 요시야 개혁 이전에 발표된 것이라고 본다.10) Fohrer도 스바니야의 연대를 종교개혁 이전인 630년경으로 잡고 있다.11) Christensen은 스바니야 2장 4-15절의 열방 신탁이 요시야가 628년 아시리아 영토인 사마리야와 므기또 지역을 점령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고 보며, 요시야는 곧이어 모압과 암몬 영역인 요르단 동편 지역과 불레셋 평야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고 본다.12)
스바니야의 예언 시기를 스키타이족의 습격이라는 사건과 관련시킴으로써 더 구체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시아에서 28년 간 지속된 스키타이족의 통치에 관한 보고, 예컨대 그 통치기간 동안 아스쿨론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을 약탈하는 행렬이 팔레스틴 사막을 거쳐 에집트 국경에까지 이어졌다는 보고 등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주자(走者)보다도 더 빠른” 야훼의 날에 대한 스바니야의 고지에 대해서나 특히 불레셋과 에집트와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신탁 모두에 대해서 그 근저에 스키타이 기마 부대의 침입을 받은 체험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 역시 옳지 않다. 다가올 날에 관한 스바니야의 진술을 “신화적인 도식”에서 끌어내려는 또 다른 극단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설같은 기마 민족들이 아시리아 제국의 북방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는 일반적인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봄으로써 스바니야 예언의 근저에 깔려 있는 역사적 요인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적 상황은 북방의 기마 민족에 관한 표상이 젊은 예레미야의 예언(예레 4-6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스바니야의 활동 시기를 B.C. 630년으로 잡는 것이 어느 정도 정확하다면 스바니야는 예레미야와 동시대인이면서도 그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이다. 스바니야의 이런 저런 어휘들로 미루어 볼 때 그 활동연대를 B.C. 640년대로 잡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스바니야가 요시아 왕(B.C. 639-609)이 아직 성년이 되기 전에 등장했다는 것에 대해서 오늘날에는 학자들이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 이러한 연대설정은 편집에 의한 표제 이외에도 본서 자체의 내용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본서에서는 B.C. 622/21년에 있었던 신명기적 개혁의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으며 더욱이 아시리아 세계 제국의 몰락에 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왕은 아직 아시리아로부터 자기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정책을 수행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특히 므나쎄(B.C. 696-642) 치하에서 만연되었던 이방 제도에의 예속성이 여전히 종교와 제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1장 8절을 보면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왕이 아니라 왕가, 즉 자세히 말해서 요시아의 아버지 아몬이 사망했을 때(B.C. 641-640) 겨우 8살이었던 요시아 왕을 대신한 섭정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다른 한편 스바니야는 요시아라는 이름과 관련된 대대적인 개혁의 길을 예비한 사람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13)
3. 형성과 구성
스바니야서는 다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1.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위협(1, 2-2, 3) : 스바니야는 이 단락에서 주님의 날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아모스(5, 18)와 이사야(2, 7이하)가 취급한 주제를 다시 다룬 것이다. 그러나 야훼의 날에 일어날 사태를 더 풍부하게 묘사함으로써 우주적인 드라마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아나와’(’anawah)라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기본적 자세를 나타내는 단어로 회개를 호소하고 있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생명을 얻으려면 정의를 사랑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낱말은 현인(賢人)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 지혜문학에 자주 등장하지만(잠언 15, 33; 18, 12; 22, 4), 예언 문학에서는 이 스바니야서에서 처음 나온다.
1.2. 이방국가에 대한 신탁(2, 4-15) : 이 단락을 스바니야가 직접 썼느냐 하는 문제는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부정적 태도로 나온 학자도 많았다. 그러나 예언 문학이라면 이방 국가에 대한 신탁을 으레 취급하는 것이 상례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남은 자’에 대한 언급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9절 참조).
1.3. 예루살렘과 이방국가에 대한 고발(3, 1-8) : 아모스서(1-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방국가를 하느님께 고발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선민인 유다를 더 신랄하게 고발하기 위한 서두 및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교백성에게 내린 재앙과 처벌은 유다에 대한 전조(前兆) 내지 질타(叱咤)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는 이교백성들이 유다의 처벌을 지켜보도록 불리기까지 한다.
1.4. 약속(3, 9-10) : 이 단락도 스바니야가 직접 기술하였느냐는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단락은 예배를 통해 작품화된 듯한 환희의 시편(14-18a)에 이어 국가부흥을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19-20절).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흥이란 혹자의 주장과 같이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환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9-10절은 이교백성의 회개라는 주제에서 흩어진 백성의 귀환이라는 주제로 넘어가고 있다. 한편 11-13절에서는 예언자가 소중하게 여긴 ‘남은 자’와 그들 신앙의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성서에서는 처음으로 가리키는 용어(‘ani, 가난한 자 : dal, 약자, 바싹 여윈 자, 비참한 자)를 사용하고 있다.14)
이것을 도식적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15)
(I) 유다에서 야훼의 날 (1, 1-2, 3)
(A) 우주적인 범위 (1, 2-3)
(B) 이교 신들 (1, 4-7)
(C) 왕실 행동 (1, 8-9)
(D) 상인들 (1, 10-11)
(E) 믿지 않는 자들 (1, 12-13)
(F) 야훼의 날 (1, 14-18)
(G) 회개로 부르심 (2, 1-3)
(II) 열국들에 대한 예언들 (2, 4-15)
(A) 팔레스타인 사람들 (2, 4-7)
(B) 모압과 암몬 (2, 8-11)
(C) 에디오피아 (2, 12)
(D) 아시리아 (2, 13-15)
(III)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들 (3, 1-8)
(A) 지도자들 (3, 1-5)
(B) 다른 나라들에의 교훈 (3, 6-8)
(IV) 약속들 (3, 9-20)
(A) 백성의 회개 (3, 9-10)
(B) 이스라엘의 남은 자 (3, 11-13)
(C) 시온의 즐거운 노래 (3, 14-18a)
(D) 유배에서 돌아옴 (3, 18b-20)
Sawyer는 포로기의 저자가 스바니야서의 흑심한 심판신탁에 구원신탁(3, 9-20)을 첨부함으로써 야훼의 격심한 진노를 풀어보려고 시도했다고 본다. 그것이 곧 온 세상이 끝난 다음 유다에게는 새 날이 밝아올 것임을 보여주는 구원신탁이 되었다는 것이다.16)
그러나 Childs는 심판 다음에 구원이 온다는 전통적인 패턴에 의해 스바니야의 구두예언이 수집되었으며 3장 14-20절만 후대의 산물이지 1-20절 모두를 포로기의 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17) Childs는 포로기 이후 편집과정에서 스바니야서가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남은 자들’이 열방 신탁 속에 남은 자 사상을 주입했으며(2, 7-9), 또 원수의 패망과 심판은 견디어 낸 옳은 자의 토지 소유를 대조시켜 놓은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방은 단지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열방이 개종한다는(3, 9) 새로운 면을 부각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18) 그러므로 Childs는 경전비평의 입장에서 스바니야서의 일부가 포로기 이전이든 이후든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며, 다만 하느님이 열방 중에 간섭하시며 또 미래 구원의 약속이 확실히 드러나게 됨이 분명히 밝혀지는 것이라고 본다.19)
최근 Paul House는 통시적 연구의 역사적 비평 방법을 지양하고 공시적 연구인 문학 비평방법을 스바니야서에 적용하며, 스바니야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예언적 드라마’(Prophetic Drama)라고 보았다. 드라마에는 그 구조상 갈등 요소가 있고 또 그 갈등을 해소하는 요소가 작용하는데, House는 스바니야서의 경우 갈등은 모든 민족의 심판주 야훼 하느님이 계약의 백성을 심판하는 것이고 이같은 갈등의 해소는 바로 ‘야훼의 날’이 된다고 설명한다.20) House는 스바니야서가 야훼와 예언자간의 대화로 이어진다고 보아, 전체를 3막 8장의 드라마로 분류하고 있다. 그의 구분은 아래와 같다.21)
1막 1, 2-17 2막 1, 18-3, 5 3막 3, 6-20
1장 일반 심판과 그 이유 1장 심판과 희망의 독백 1장 갈등해소
야훼 1, 2-6 야훼 1, 18-2, 7 야훼 3, 6-13
예언자 1, 7
2장 유다 심판과 그 이유 2장 심판과 희망(계속) 2장 최후의 독백
야훼 1, 8-13 야훼 2, 8-10 야훼 3, 18-20
예언자 1, 14 예언자 2, 11
3장 야훼의 독백 3장 최후의 협박
야훼 1, 17 야훼 2, 12
예언자 2, 13-3, 5
House는 종래의 역사 비평적 방법은 본문의 역사 연구에 머물렀다고 보며, 본문 그 자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공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본다. House는 스바니야서의 본문이 ‘예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예언서들과 비교해 볼 때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죄, 하느님의 심판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과 미래 축복 등의 예언의 핵심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22) 그러면서 그는 스바니야서가 희곡의 요소를 간직하였기 때문에 전체를 하나의 예언적 드라마로 읽으면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고 보는 것이다.
4. 스바니야의 주요 메시지
스바니야는 당시대 지도층의 타락과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3, 1-4)
Sawyer는 스바니야가 나훔과 하바꾹과는 달리 자기 백성의 우상 숭배와 교만을 공격한다고 보고 있다.23) Blenkinsopp는 스바니야가 요시야왕 초기에 궁중에 있던 친아시리아 당파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외국의 의상을 착용하며 외국의 관습에 젖어 일월 성신을 섬기고 밀곰에게 맹세하는 혼합주의자들이라고 보았다(1, 4-6).24) 스바니야는 요시아왕 초기까지도 성행했던 므나쎄의 혼합주의 종교 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4.1 야훼의 날
스바니야는 야훼의 준엄한 심판을 선언한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야훼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야훼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1, 6). 스바니야는 야훼께서 벌주시는 날을 ‘야훼의 날’(1, 7.10.12.14;2, 2;3, 8.9.11.16)이라고 보았다. 이 날에는 지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다 멸망될 것이라고 보았다. “야훼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한 것이다.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야훼의 말이니라”(1, 2-3). Sawyer는 주전 627년 앗슈르바니팔의 죽음으로 국제적 불안이 조성되었을 당시 ‘야훼의 날’ 이미지가 생겼을 것이라고 본다.25) Fohrer는 스바니야가 이사야와 아모스의 ‘야훼의 날’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말한다.26) 그러나 Christensen은 아모스의 ‘야훼의 날’ 개념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계약파기로 인해 하느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지만, 스바니야의 경우는 역사의 영역을 벗어난 종말론적인 야훼의 날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야훼의 진노가 온 땅을 불태우고 난 뒤(3, 9) 남은 자들을 통해 야훼의 영광이 다시 수집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27)
House는 야훼의 날에 야훼가 내리는 심판이 스바니야 예언의 핵심을 이룬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House는 스바니야서가 여러 가지 은유를 사용해 ‘야훼의 날’의 공포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8) House는 우선 시각적인 효과로서 ‘싹쓸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 지면에서 모든 생명체를 싹 쓸어버리는 것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효과를 준다. 그 다음에는 암흑의 이미지이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파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1, 15). 이 같은 암흑은 사람을 소경같이 만들게 된다(1, 17a). 야훼가 지상에서 피조물을 쓸어버리는 날에는 온 세상이 암흑 천지가 될 것이다. House는 또 야훼의 진노가 야훼의 행동을 유발한다고 보고 있다. “나 야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3, 8). House는 야훼의 행동을 보여주는 동사들을 아래와 같이 열거한다.29) 멸절하리라(1, 3), 끊어버리리라(3, 6), 벌할 것이라(1, 8), 두루 찾아 벌하리라(1, 12) 재물을 노략하리라(1, 13), 고난을 내리리라(1, 17), 멸하리라(2, 5), 살육하리라(2, 12), 해하리라(3, 11).
4.2 남은 자
스바니야는 이같이 무서운 야훼의 심판을 선포하지만 그래도 ‘남은 자’는 그 땅을 차지하며 회복된 공동체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2장 7. 9절에는 남은 자가 심판이 끝나는 날에 유다의 악한 이웃들의 땅을 차지할 것을 말한다. 이들 남은 자는 안전하게 거할 것이며 황금시기에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 의해 존경을 받을 것이다(3, 20). Newsome은 스바니야가 심판 이후에 야훼가 새롭게 건설할 이상적인 사회는 겸손하고 신실하며 정직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본다(3, 12-13).30) 이같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가능한 것은 “그 중에 거하시는 야훼는 의로우나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기”(3, 5) 때문이다. House는 야훼의 사랑이 그의 행동을 통해서 새롭게 나타남을 보여준다.31) 즉 야훼는 유다와 함께 있으며(3, 15), 두려움을 제거하고(3, 15), 너로 인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3, 17), 쫓겨난 자를 모으며(3, 19), 유다에게 명성과 칭찬을 되돌려(3, 20) 주게 될 것이다.
4.3 가난한 자
스바니야는 죄악이 교만에서 연유한다고 규정하고(2, 10.15;3, 11), 그 죄악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밀어닥칠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그 재앙이란 바로 원수의 침략이다. 그러나 스바니야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죄악과 원수의 침공보다 미구에 다가올 하느님의 엄중한 처벌이다. 여기서 스바니야는 아모스가 천명한 바 있는 ‘야훼의 날’이라는 주제를 다시 들고 나온다. 그러나 야훼의 날에 벌어진 비극의 폭(幅)을 아모스보다 훨씬 넓게 확대하였다. 다시 말해 우주 전체가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멸될 때 이스라엘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 야훼의 날을 목전에 둔 비통한 음률은 그리스도교의 장례미사 노래(Dies Irae)뿐 아니라 괴테의 파우스트에까지 스며 있다. 그러나 비록 비극의 예고로 점철된 메시지이지만 마지막 일말의 희망까지 말살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이 남은 자란 재앙에서 구원될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다(2, 3). 그는 사회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성적인 차원에서 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즉 그들은 주님을 찾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굴종과 겸손의 뜻이 내포된 ‘아나와’(‘anawah)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스바 3, 11-12에 와서는 이 단어의 의미가 다소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가난하고’(‘ani, 아니) ‘비참한’(dal, 달) 이 백성은 주님에게 달아들어 피신처를 찾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거만한 사람들로서 뽐내기를 좋아하고 거짓과 불의에 젖은 사람들이다.32)
4.4 겸손한 자
첫 번째 심판 신탁을 끝맺는 명령에는 독특한 말이 나온다. “야훼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땅]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이 구절은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기 위해 야훼와 의(義)와 겸손을 구하라고 간절한 어조로 말한다(2, 3). 이 권고는 3장 11-13절에서 약속 선포로 변형된다. 후자의 선언에 의하면, 야훼는 “야훼의 이름에서 위안을 구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는” “겸손하고 비천한 백성”을 남기고, 유다의 교만과 완고함을 정화함으로써 유다를 구원할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개심하기 위한 실제 조처를 위한 “겸손한 자”들의 집단이 야훼의 날에 무서운 심판이 있은 후에 유다를 갱신하는 역사적 매체가 될 것이다. 이것이 스바니야라는 예언자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 신탁들의 끝부분에서 한층 복잡한 것들이 첨가된다. 이것들은 3장 1-5절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도입될 때까지 통례적으로 계속된다. 이러한 배열은 아모스서 1-2장의 외국에 대한 신탁들 가운데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신탁을 포함한 예에서 영향받았을지 모른다. 여기에서의 요점은 뭇민족들과 함께 유다는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이다. 스바니야 3장 6-10절에서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징계받은 민족들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야훼를 예배하는 새로운 기회들을 창출해야 할뿐만 아니라, 유다에 대해서는 자기 교정의 기초 역할을 응당 해야 한다는 “예상 밖의 독특한 내용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4.5 구원 약속
스바니야서는 포로기 이사야와 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축하하고 황홀한 기쁨의 노래로 끝나는데, 이 노래의 강조점은 억압자들의 패배와 추방당한 자들을 다시 모으는 것에 있다(3, 14-20). 이러한 내용이 뭇민족들에 대한 구원 약속과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바로 그와 동일한 “어려움”이 포로기 이사야의 말 안에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포로기 말의 지평이나 포로기 이후 초기의 지평에 속하는 본서의 최종 편집들일 것이다. 스바니야가 말하는 야훼의 날은 지구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편화되며, 한편 이 날은 뭇민족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의 날이겠지만, 거기에는 그 민족들의 회심 가능성(확실성)도 내포되어 있다. 유다와 뭇민족들 가운데 교만하고 완고한 자들은 멸망당하고, 유다와 뭇민족들 가운데 겸손하고 비천한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이러한 희망들이 무시무시하고 과장된 것일지라도, 그것들은 세상의 종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며 뭇민족들의 잘 알려진 정치체제의 와해를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포로기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이 최종 편집층은 귀환시키는 것을 묘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페르시아 같이 언제나 지배만 하는 국가는 묘사되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우리는 “겸손하고 비천한” 유대인 추방자들 또는 팔레스틴 귀환자들로 이루어진 투쟁하는 공동체를 거기에서 볼 수 있다.33)
5. 가치34)
스바니야서는 비록 작지만, 가치 있는 책이다. 많은 사람에 의해서 스바니야서가 과소평가되고 있는데, 우리들 대부분이 강단의 본문으로서는 비교적 미흡한 책이라고 간과하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본서는 영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한 권의 책은 그것의 크기로 평가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3, 14-20의 단락은 구약의 가장 초기의 묵시문학들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스바니야서에서 가장 훌륭한 점이며, 두 개의 놀라운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 ① “야훼께서 너의 가운데 계신다”(15, 17절), 그리고 ②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20절). 이는 고난 후에 영광이 오기 때문이다. 유다의 포로됨은 형세가 바뀌어질 것인데 후에 영광이 오기 때문이다.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불을 통과한 후에 받게 될 것이다. 야훼의 남은 자가 온전한 황금기를 누릴 것이다. 스바니야의 예언들 가운데 메시아 환성에서 보았던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위대한 구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고 믿어진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하늘나라에 대한 그의 개념이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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