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 십분의 일세(박하와 운햐얘을 바치면서도…

 

불행하도다. 너희 바리사이들!


<말씀연구>


가치의 전도.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자질구레한 계명은 지키고 있으면서도 중요한 계명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불행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42  그러나 불행하도다, 너희 바리사이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푸성귀는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정의와 하느님 사랑은 제쳐 놓는구나. 그런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이런 것들도 실천해야 했을 것이다.


구약에서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와 곡식에 한해 십분의 일세를 바쳤습니다(민수18,12).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징세 범위가 확대되어 과일과 가축의 경우에도 십분의 일세를 바쳤습니다(레위27,30; 신명 14,22-23).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는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따위 양념 향신료에까지 확대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의 지나친 열심에 따라 십일조 소에 일반 향료 식물까지 포함시켜 그 규정을 터무니없이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제멋대로 확대시켜 놓았지만 그에 따라 자연히 참으로 중요한 것들은 소홀히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질구레한 계명의 예로서 먹는 야채는 10분의 1을 바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다인은 밀과포도주와 기름의 세 가지 세를 바칠 의무가 있었는데 경건하다고 자처하고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땅에서 거둔 것이라면 어떤 생산물이라도 그 세를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를 나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보다는 윤리를 중요시하십니다. 그리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정의와 자비와 신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정의”의 그리스 원어는 “크리시스”로서 본디 “법” 또는 “재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합법적 재판, 의로운 재판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법을 집행하고 가르치는 이들의 마음에 비수를 찌르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 6 장 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반기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재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 다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배자들은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동시에 가난한 자들을 등쳐서 이익을 얻기를 거부하고 일할 때나 임금을 지불할 때 정직하며 결혼 계약에 충실하고 약한 자와 억눌린 자들을 도우려고 노력하는 진실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예언자들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요구하였습니다.




즈가리야 예언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사실대로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동족끼리 서로 신의를 지키며 열렬히 사랑하여라. 과부와 고아, 더부살이와 영세민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마음을 품지 말아라.  이렇게 일러 주셨는데도 사람들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한 채 귀를 막았다.”(즈가리야 7,9-11)




정말 중요한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43  불행하도다, 너희 바리사이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사제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미사 중에 제일 높은 자리에 앉는 것도 사제요(아참! 성가대가 더 높군요), 신자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중앙에 앉는 것도 사제요,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인사 받는 것도 사제이니 말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덕적 품행을 외적 형식의 준수만으로 판단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당연히 자기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서 높은 자리와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자처하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존경받을 값진 것은 겸손과 마음의 순결입니다. 그럴 때 더욱 높은 자리에 앉혀 주고, 더욱 깊이 진실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44  불행하도다, 너희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아 사람들이 그 위로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모르는구나.”


과월절이 가까워지면 유다인은 무덤을 희게 칠하였습니다. 무덤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그 무덤에 접촉하면 이렛 동안 부정(민수19,16;루가11,44)을 탓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하려 했던 것입니다. 의식상 부정하게 되면 기도나 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도 티베리아 근교에 산재한 율사들의 무덤에 가보면 아예 무덤 옆에다가 횟가루와 반죽 통을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덤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썩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 고 있습니다. 햇빛을 받은 흰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웠으나 안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사람들에게 그들의 참된 본질을 속이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모욕적인 꾸짖음입니까?


화장발에 속지 말고, 조명발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을 쓰더라도 감추려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리 좋게 포장을 했더라도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포장 기술이 발달해서 선물 값 보다는 포장 값이 더 나가는 느낌을 주는 것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45  그러자 율법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여 예수께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교사들의 유순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교사들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생활로 실천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신 비난은 곧 율법교사들에게 하신 비난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 율법학자들 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그럴만도 합니다. 대놓고 욕을 하고 계시니.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면 어떻습니까? 그 말을 잘 받아들이는 편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은 “내가 너랑 친해서 하는 말인데, 너는 이게 나빠!”라고 합니다. 친한 사람의 말도 귀에 거스르는데 하물며…




그런데 이제는 화살이 바리사이에서 율법학자로 넘어갑니다.


46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학자들도 불행하도다, 너희는 힘겨운 짐들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은 그 짐에 제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는구나.


율법교사들은 스스로를 예언자들과 같은 위치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언자들이나 모세 또는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말에도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자기네가 해석한 율법규정을 엄격히 지키라고 가르쳤으나 자기 자신들에게는 법률상 도피구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가르친 것마저 자기네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꾸중을 듣지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법대로 살지 않고, 윤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살지 않고…그런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니 큰일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아닌 것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분.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군중들은 얼마나 속 시원했을까요? 나의 모습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2. 타성에 젖어서 살아가다보면 잊고 사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10년전의 나의 모습과 지금의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10년 후의 나의 모습은 어떠했으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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