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님을 구박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님을 구박하는가? 


 


무슨 말을 하거나 판단을 할 때는 끝까지 들어보고 이야기 합시다. 중간에 듣다가 화를 내면 상대방도 마음이 아프거든요. 그런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상대방이 그러면 화를 내면서도 말입니다. 오늘 말씀 들어보면서 혹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가 잘못생각해서 일어나는 분노는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님을 구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입니다.


또 한 가지, 내가 모른다고 하여 상대방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지금 느끼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돌고 있고, 수많은 인공위성들이 내 머리 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느끼지 못하지만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내 보잘것 없는 좁은 머리에 세상을 담으려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31 이 때에 유다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그것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한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라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께 대한 불신을 가리키고,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으로만 몰아세웠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라는 말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의도와 적개심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성전에서 돌맹이 장사 했으면 그날 잘 팔렸겠습니다…)




32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도보다는 유다인들로 하여금 좀더 깊이 생각하도록 이끄는 데 역점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일들이 좋은 일들로 강조되고, 아버지로부터 위임된 일들로 평가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깊은 친교를 나누고 계시다는 것이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애수가 섞인 예수님의 말씀. 좋은 일을 보고도 악한 일로 몰아세우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예수님의 마음.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인들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주고 이렇게 대들고 있습니다.


33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느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히려 비난하고 신성 모독죄로 몰아세웠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께 대한 유다인들의 불신이 더욱 확고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유다인들의 이런 비난은 복음서가 씌어질 당시에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진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격렬한 비난과 논박이 당시 유다인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행세”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행세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요, 병든 사람을 고쳐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손수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행세만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저 “그런 척”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시기에 죽은 이를 살리실 수 있는 것이며(라자로의 부활), 중풍병자와 소경을 고쳐 주실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행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4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하느님은 율법을 당신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칭했다는 뜻입니다. 시편 82,6에서 판관들을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대표하는 사람을 “신”이라 칭하는 사례를 구약성서의 다른 대목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출애 4,16;7,1; 시편 45,7; 즈가12,8 참조).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신들로 칭해진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말씀, 곧 당신 계시의 전달자로서 파견된 예수님이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모른다 치더라도 말입니다.




35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세상 모든 심판관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심판하는 법관은 그의 직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권위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 때문에 신적인 명칭까지도 부여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역사 이래 최초의 위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축성되고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으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36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 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그러므로 세상에 파견되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분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들”로 칭해진 자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하느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성모독을 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칭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37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당신의 일과 연관시켜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믿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딘 마음을 가진, 그래서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보도고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 하실수록 예수님을 죽이려고만 하였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경우를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가들은 그 사람의 모습을 깎아 내립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어두움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모습이 가려질까요?




38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일들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이고, 그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만이라도 진지하게 보고서 믿음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9 그 때에 유다인들이 다시금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다.


“다시금”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얼마나 많이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던가? 얼마나 많이…하지만 아직은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좀더 교묘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유다인들의 교묘한 계획의 도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의 계략에 넘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도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40 예수께서는 다시 요한이 전에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거기에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피하셔서 요르단 강 건너편에 머무르십니다.




41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 와서 서로 “요한은 기적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그가 이 사람에 관해서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 하면서


진실이라는 표현은 세례자요한을 진리의 증언자로 인정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했고, 그 증언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일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오해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른 뒤에 내 행동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모두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진실이라고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내 행동을 통해서…,




42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첫날을 보내시고, 최초의 제자들을 모으셨던 그곳으로 다시 가십니다. 아마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곳을 가 보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보고 믿었습니다. 시골 촌사람들의 믿음. 똑똑하다는 유다인들의 불신. 참으로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좋을 이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대합니까? “역시 훌륭한 사람이야. 나도 저렇게 해 봐야지”라는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내가 못한다고 하여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까? 또한 그런 돌에 맞아 본 적이 있으십니까?




2.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의 정의를 내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어리석어 보이는 시골 사람들은 보고 믿었지만, 잘났다는 사람들은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틀의 한계가 바로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아니 얼마나 알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이 글은 카테고리: 지난 묵상 보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