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마르코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복음).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소리가 들려왔도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알렐루야
복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
그때에 요한은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믿고 바라는 영원한 구원을 이 성사로 얻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도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도다.
영성체 후 묵상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사건은 여러 가지입니다.
삼왕에게, 목동들에게,
시므온과 안나에게, 그리고 오늘은
세례라는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내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합니까?
세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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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물이 축성됩니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내려 오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고자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려고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사랑이 많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로 축성하신 그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 또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물이 축성됩니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내려 오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고자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려고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사랑이 많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로 축성하신 그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 또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도 당신께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마음에 드는 딸이다“
하는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헬레나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
헬레나야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란다“
헬레나야 너는 나의 말을 믿을 수있겠니?
내가 사랑하는 딸 헬레나야“
예! 주님!
저는 당신께서 사랑하는 딸 헬레나입니다
저는 당신의 자녀입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 헬레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의 자녀이기에 기쁩니다
당신의 자녀이기에 행복합니다
아멘
“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묵상하며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써 그 분의 자녀답게
그 분의 자녀다운 신앙생활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기쁩니다
저 같은 사람이 감히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도 당신께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마음에 드는 딸이다“
하는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헬레나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
헬레나야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란다“
헬레나야 너는 나의 말을 믿을 수있겠니?
내가 사랑하는 딸 헬레나야“
예! 주님!
저는 당신께서 사랑하는 딸 헬레나입니다
저는 당신의 자녀입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 헬레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의 자녀이기에 기쁩니다
당신의 자녀이기에 행복합니다
아멘
“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묵상하며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써 그 분의 자녀답게
그 분의 자녀다운 신앙생활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기쁩니다
저 같은 사람이 감히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 세례 축일
주님의 세례 역시 주님이 누구신지를 공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8세기 말 성탄 축일을 본받아 공현 축일도 8일간 지내면서 제8일째 되는 날 주님의 세례 기사를 읽도록 하였습니다. 13세기 프랑스에서 이날을 주님의 세례 축일로 지냈습니다. 로마 전례력에는 1960년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물이 축성됩니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내려 오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고자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려고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사랑이 많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로 축성하신 그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 또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4.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
1.
2.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예수님의 세례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밝혀진 계시사건, 이른바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건과 결부시켜 보도한다(마르 1,9-11; 마태 3,13-17; 루가 3,21-22).1)
이에 비해서 요한 복음사가는 약간 달리 보도한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로 왔었다고 만 언급하면서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세례자 요한이 몸소 체험하여 증언하는 것으로 대신한다(요한 1,29-34). 아무튼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활동과 결부된 채 전승되었다는 점만은 복음사가들의 일치된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사건(예수님의 세례와 신적현현)에 관한 전승사적 문제는 우리 주제의 범위에 약간 벗어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의 사건을 서술묘사해주는 내용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신적현현 사화(창세 15,1-4; 신명 4,36 등)의 소재들을 우리 대목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늘이 갈라지고(또는 열리고)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 위에 내려왔다는 환시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는 환청이 그것들이다. 사실상 신적현현 사화에서 있어서 환시와 환청은 서로 결속되어 있다. 즉 환청은 환시에 곧바로 이어져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대목에서 보면, 환시와 환청의 체험주체가 복음사가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특히 마르코에 있어서는 예수 홀로 체험한 주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이어 반해서 마태오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영이 임한 것’만 예수 홀로 체험한 것으로 되어 있고, 환시의 일부분 곧 ‘하늘이 열리는 것’과 환청은 주위 사람들도 체험한 객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루가에 있어서는 환시는 객관적인 사실로, 환청은 주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의 경우는 또 다르다. 세례자 요한이 몸소 체험한 것으로 보도되어 있는데, 공관 복음사가들이 보도한 그런 환시나 환청은 없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예언 말씀대로 영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예수 위에 내려와 머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요한 1,32-34). 이와 같이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의 현상과 그 체험에 관한 보도내용이 각 복음사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것은 전승과정이나 각 복음사가들의 신학사상이 반영된 편집에서 기인된 결과로 본다.
‘하늘이 갈라지다’(마르) 또는 ‘하늘이 열리다’(마태, 루가)란 표현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공관복음사가) 또는 ‘하느님이 말씀하셨다’(요한)란 표현과 함께 신적 세계의 체험을 서술묘사하는 묵시문학적인 표현기법에 속한다. 또한 ‘보았다’(εἶδεν)란 표현도 묵시문학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문용어로써 환시자의 신비스런 체험을 시사한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이 천상적인 것을 지상에서 체험한 현상들을 서술묘사하는 문학적인 표현기법인 것이다. 우리 대목의 표현들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하늘이 갈라지다’(또는 열리라)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란 표현은 신적현현의 장면(하느님의 영이 내려오는 것과 하느님의 계시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서술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도입부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란 표현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영이 예수님께로 임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시각적인 표현이다. 특히 루가는 ‘몸의 모양을 하고서’(σωματικῷ)란 말을 첨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 묘사한다(3,22). 하느님의 영을 ‘비둘기처럼’표상한 까닭은 비둘기는 우선 하늘에서 움직이는 날짐승이요, 여러 날짐승 가운데 비둘기만이 혼을 지닌 神들의 새로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성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대 에집트나 희랍의 여러 종교에서 비둘기는 혼을 지닌 새로서 神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성서에서도 비둘기는 특별한 날짐승으로 언급된다. 야훼 하느님께 날짐승을 번제물로 바칠 경우 비둘기를 봉헌하라고 법으로까지 규정했다(레위 1,14). 예수님의 부모도 율법에 따라 비둘기를 제물로 봉헌했다(루가 2,24).
예수님의 시대에도 역시 비둘기는 성전의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마르 11,15; 요한 2,14).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내려와 머물렀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의 형상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신적현현을 묘사하는 소재일 뿐이다. 즉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비유되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예수님께로 임한 실제적인 통교에 역점을 둔 일종의 시각적인 표현기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환시적인 신적현현 가운데 하느님의 영으로 무장된 예수님의 정체가 계시된 셈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또 다른 계시는 청각적인 표현기법 곧 환청으로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란 표현은 우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示顯을 가리키고, 환청으로 들린 계시말씀 곧 하느님의 계시말씀은 예수님의 정체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준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마르 1,11 병행구). 이 계시말씀은 시편 2,7과 이사 42,1에 바탕을 둔 것으로써 공관복음사가가 모두 보도한 내용이다.
그런데 마태오만은 2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행해진 말씀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객관화되어 있다. 아마도 마태오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는 데만 역점을 두는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즉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이제(예수님의 세례 시) 그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고자 한 것으로만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는 요한 복음사가의 보도내용(1,34)도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코와 루가에 있어서는 좀 다르다. 예수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면서 언급된 계시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앞으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에 그 역점이 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영’(πνεύμα)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으로 무장된 메시아’(이사 11,2; 42, 1; 61,1)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ὁ υἱóς ὁ ἀγαπητóς)이란 말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yāhîd란 낱말이 ‘사랑하는’ 또는 ‘유일무이한’이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예수님께서는 요한계 문헌에 나오는 하느님의 ‘외아들’(ὁ υἱóς ὁ μονογενής)이란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과 예수와의 이런 관계는 또한 서로 ‘하나’(ἕν)가 되는 일치의 관계라는 뜻도 내포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예수를 ‘어여삐 여겼다’(εὐδóκησα)란 표현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 얻었다는 본래의 의미를 의역한 말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세계에서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인물로서 즉 당신의 뜻을 가장 잘 구현시킬 수 있는 인물로서 예수를 선택했다는 그리스도論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은 우선 지상에서 하느님과 예수와의 내적인 통교 내지는 신비스런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예수님의 인격을 그리스도論적으로 설명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런 신적현현이 예수님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되었다는 말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그런 계시사건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목의 신적현현 사화는 그리스도論적인 이해지평선상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서적인 사화라고 말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받은 세례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었다. 그 세례는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밝혀진 계시사건의 계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 현현이 마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하느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으로 묘사하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한 것으로 보도한다(1,33 -34).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보여주고자 하는 요한 복음사가의 신학적인 의도의 반영으로 볼 수 있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 세례 축일
주님의 세례 역시 주님이 누구신지를 공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8세기 말 성탄 축일을 본받아 공현 축일도 8일간 지내면서 제8일째 되는 날 주님의 세례 기사를 읽도록 하였습니다. 13세기 프랑스에서 이날을 주님의 세례 축일로 지냈습니다. 로마 전례력에는 1960년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물이 축성됩니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내려 오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고자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려고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사랑이 많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로 축성하신 그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 또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4.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
1.
2.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예수님의 세례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밝혀진 계시사건, 이른바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건과 결부시켜 보도한다(마르 1,9-11; 마태 3,13-17; 루가 3,21-22).1)
이에 비해서 요한 복음사가는 약간 달리 보도한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로 왔었다고 만 언급하면서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세례자 요한이 몸소 체험하여 증언하는 것으로 대신한다(요한 1,29-34). 아무튼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활동과 결부된 채 전승되었다는 점만은 복음사가들의 일치된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사건(예수님의 세례와 신적현현)에 관한 전승사적 문제는 우리 주제의 범위에 약간 벗어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의 사건을 서술묘사해주는 내용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신적현현 사화(창세 15,1-4; 신명 4,36 등)의 소재들을 우리 대목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늘이 갈라지고(또는 열리고)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 위에 내려왔다는 환시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는 환청이 그것들이다. 사실상 신적현현 사화에서 있어서 환시와 환청은 서로 결속되어 있다. 즉 환청은 환시에 곧바로 이어져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대목에서 보면, 환시와 환청의 체험주체가 복음사가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특히 마르코에 있어서는 예수 홀로 체험한 주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이어 반해서 마태오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영이 임한 것’만 예수 홀로 체험한 것으로 되어 있고, 환시의 일부분 곧 ‘하늘이 열리는 것’과 환청은 주위 사람들도 체험한 객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루가에 있어서는 환시는 객관적인 사실로, 환청은 주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의 경우는 또 다르다. 세례자 요한이 몸소 체험한 것으로 보도되어 있는데, 공관 복음사가들이 보도한 그런 환시나 환청은 없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예언 말씀대로 영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예수 위에 내려와 머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요한 1,32-34). 이와 같이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의 현상과 그 체험에 관한 보도내용이 각 복음사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것은 전승과정이나 각 복음사가들의 신학사상이 반영된 편집에서 기인된 결과로 본다.
‘하늘이 갈라지다’(마르) 또는 ‘하늘이 열리다’(마태, 루가)란 표현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공관복음사가) 또는 ‘하느님이 말씀하셨다’(요한)란 표현과 함께 신적 세계의 체험을 서술묘사하는 묵시문학적인 표현기법에 속한다. 또한 ‘보았다’(εἶδεν)란 표현도 묵시문학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문용어로써 환시자의 신비스런 체험을 시사한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이 천상적인 것을 지상에서 체험한 현상들을 서술묘사하는 문학적인 표현기법인 것이다. 우리 대목의 표현들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하늘이 갈라지다’(또는 열리라)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란 표현은 신적현현의 장면(하느님의 영이 내려오는 것과 하느님의 계시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서술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도입부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란 표현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영이 예수님께로 임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시각적인 표현이다. 특히 루가는 ‘몸의 모양을 하고서’(σωματικῷ)란 말을 첨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 묘사한다(3,22). 하느님의 영을 ‘비둘기처럼’표상한 까닭은 비둘기는 우선 하늘에서 움직이는 날짐승이요, 여러 날짐승 가운데 비둘기만이 혼을 지닌 神들의 새로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성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대 에집트나 희랍의 여러 종교에서 비둘기는 혼을 지닌 새로서 神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성서에서도 비둘기는 특별한 날짐승으로 언급된다. 야훼 하느님께 날짐승을 번제물로 바칠 경우 비둘기를 봉헌하라고 법으로까지 규정했다(레위 1,14). 예수님의 부모도 율법에 따라 비둘기를 제물로 봉헌했다(루가 2,24).
예수님의 시대에도 역시 비둘기는 성전의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마르 11,15; 요한 2,14).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내려와 머물렀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의 형상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신적현현을 묘사하는 소재일 뿐이다. 즉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비유되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예수님께로 임한 실제적인 통교에 역점을 둔 일종의 시각적인 표현기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환시적인 신적현현 가운데 하느님의 영으로 무장된 예수님의 정체가 계시된 셈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또 다른 계시는 청각적인 표현기법 곧 환청으로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란 표현은 우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示顯을 가리키고, 환청으로 들린 계시말씀 곧 하느님의 계시말씀은 예수님의 정체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준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마르 1,11 병행구). 이 계시말씀은 시편 2,7과 이사 42,1에 바탕을 둔 것으로써 공관복음사가가 모두 보도한 내용이다.
그런데 마태오만은 2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행해진 말씀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객관화되어 있다. 아마도 마태오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는 데만 역점을 두는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즉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이제(예수님의 세례 시) 그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고자 한 것으로만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는 요한 복음사가의 보도내용(1,34)도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코와 루가에 있어서는 좀 다르다. 예수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면서 언급된 계시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앞으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에 그 역점이 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영’(πνεύμα)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으로 무장된 메시아’(이사 11,2; 42, 1; 61,1)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ὁ υἱóς ὁ ἀγαπητóς)이란 말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yāhîd란 낱말이 ‘사랑하는’ 또는 ‘유일무이한’이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예수님께서는 요한계 문헌에 나오는 하느님의 ‘외아들’(ὁ υἱóς ὁ μονογενής)이란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과 예수와의 이런 관계는 또한 서로 ‘하나’(ἕν)가 되는 일치의 관계라는 뜻도 내포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예수를 ‘어여삐 여겼다’(εὐδóκησα)란 표현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 얻었다는 본래의 의미를 의역한 말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세계에서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인물로서 즉 당신의 뜻을 가장 잘 구현시킬 수 있는 인물로서 예수를 선택했다는 그리스도論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은 우선 지상에서 하느님과 예수와의 내적인 통교 내지는 신비스런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예수님의 인격을 그리스도論적으로 설명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런 신적현현이 예수님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되었다는 말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그런 계시사건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목의 신적현현 사화는 그리스도論적인 이해지평선상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서적인 사화라고 말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받은 세례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었다. 그 세례는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밝혀진 계시사건의 계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 현현이 마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하느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으로 묘사하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한 것으로 보도한다(1,33 -34).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보여주고자 하는 요한 복음사가의 신학적인 의도의 반영으로 볼 수 있겠다.
“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세례자요한성인처럼 저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겸손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례자요한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이 남보다 잘난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자신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비굴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깍아내리지 않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겸손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례자요한처럼…….
아닌 것은 아니라고 증언하며
신앙인으로써 합당하게 솔직하게 자신을 과대포장하지 않으며
남에게 사랑을 배푸는 사랑이 많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다짐을
해봅니다
오늘복음으 묵상하면서 세례자요한성인처럼….
“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묵상하며
이제 새로 시작한 올 한해동안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실천하기는 쉽지않겠지만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으로….
“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세례자요한성인처럼 저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겸손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례자요한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이 남보다 잘난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자신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비굴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깍아내리지 않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겸손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례자요한처럼…….
아닌 것은 아니라고 증언하며
신앙인으로써 합당하게 솔직하게 자신을 과대포장하지 않으며
남에게 사랑을 배푸는 사랑이 많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다짐을
해봅니다
오늘복음으 묵상하면서 세례자요한성인처럼….
“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묵상하며
이제 새로 시작한 올 한해동안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실천하기는 쉽지않겠지만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주님! 당신을 찬미하도록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당신이 선택한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너무도 제멋대로인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자기만 알고 남을 전혀 배려할줄 모르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기분내키는대로 움직이고 아니면 전혀 미동도않는 저의 못된성질도 마음에
드시는지요?
남들이 잘한다는 그 한마디에 우쭐해서 자기가 잘나서 그런다고 착각하고
사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이들한테도 욕심이 많아서 제마음대로 안되면 윽박지르고 소리지르고
막대하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쓸떼없는 욕심과 과욕을 부리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
이런 모든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아가려고
노력하렵니다.
당신이 저를 이만큼 사랑하고 계심을 알기에…
†주님! 당신을 찬미하도록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당신이 선택한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너무도 제멋대로인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자기만 알고 남을 전혀 배려할줄 모르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기분내키는대로 움직이고 아니면 전혀 미동도않는 저의 못된성질도 마음에
드시는지요?
남들이 잘한다는 그 한마디에 우쭐해서 자기가 잘나서 그런다고 착각하고
사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이들한테도 욕심이 많아서 제마음대로 안되면 윽박지르고 소리지르고
막대하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쓸떼없는 욕심과 과욕을 부리는 이 아녜스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
이런 모든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아가려고
노력하렵니다.
당신이 저를 이만큼 사랑하고 계심을 알기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
당신이 저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깨닫는 요즈음입니다
친정아버지께서 당신께 가신지 8일째가 되는데 아직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눈물이 나는데 그때마다 당신께 기도를 하게되면 마음이
편안해지며 아버지께서 당신의 품에서 잘 지내시리라는 믿음이 생기니
울다가도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당신을 믿는 마음이…..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이렇게 큰 줄 저도 몰랐습니다
만약에 제가 당신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가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집니다
35년 년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10년정도 어머니라는 말 만들어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고 어린나이다보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제가 조금씩 마음을 추수리는 것을 보니 당신께서 저의 곁에
계셔서 도와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기쁩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보다 지금의 저의 상황이 많이 변했지만
남편도 있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있고 …….
하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며칠동안은 몰랐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형제들도 있고 남편도 있었고 아들도 있어서인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고생하시는 것 보다는
비록 저의 곁을 떠나셨다는 아쉬움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아프고 눈만 뜨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하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나니 참 힘듭니다
주님!
저의 이런 마음 모두를 당신께 봉헌하오니 부모님께 못다한 효도를
당신을 의지하며 당신을 더욱 사랑하며 당신만을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모님께서 당신의 품에서 편히 쉬고 게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슬퍼하지 않으며 기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을 믿으며 당신께 저의 모두를 맡기며…..
당신의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주십시오
당신께서 저에게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 헬레나다라는.
말씀을 들을수 있도록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당신만을 의지하며 당신만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아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묵상하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
당신이 저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깨닫는 요즈음입니다
친정아버지께서 당신께 가신지 8일째가 되는데 아직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눈물이 나는데 그때마다 당신께 기도를 하게되면 마음이
편안해지며 아버지께서 당신의 품에서 잘 지내시리라는 믿음이 생기니
울다가도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당신을 믿는 마음이…..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이렇게 큰 줄 저도 몰랐습니다
만약에 제가 당신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가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집니다
35년 년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10년정도 어머니라는 말 만들어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고 어린나이다보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제가 조금씩 마음을 추수리는 것을 보니 당신께서 저의 곁에
계셔서 도와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기쁩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보다 지금의 저의 상황이 많이 변했지만
남편도 있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있고 …….
하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며칠동안은 몰랐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형제들도 있고 남편도 있었고 아들도 있어서인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고생하시는 것 보다는
비록 저의 곁을 떠나셨다는 아쉬움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아프고 눈만 뜨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하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나니 참 힘듭니다
주님!
저의 이런 마음 모두를 당신께 봉헌하오니 부모님께 못다한 효도를
당신을 의지하며 당신을 더욱 사랑하며 당신만을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모님께서 당신의 품에서 편히 쉬고 게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슬퍼하지 않으며 기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을 믿으며 당신께 저의 모두를 맡기며…..
당신의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주십시오
당신께서 저에게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 헬레나다라는.
말씀을 들을수 있도록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당신만을 의지하며 당신만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아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묵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