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부활 제2주간 월요일(4/16)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세례의 신비를 계시하신다. 세례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게 해 준다(복음).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 ◎ 알렐루야.
    복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8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기쁨에 가득 찬 교회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고, 이렇게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셨듯이, 영원한 즐거움의 열매도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예수님께서 오시어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셨도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알렐루야.
    영성체 후 기도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썩지 않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어느 날, 임원 회의에서 부산 공장의 폐수 시설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본 폐수 처리 분야 최고의 기술을 가진 곳을 찾았는데, 놀랍게도 그곳은 과거 우리의 합작 회사이자 집적 회로에서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종합 전자 회사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곳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부산 공장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는 이러한 질문부터 던졌다. ‘폐수 처리 시설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폐수 처리를 하려고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이렇게 대답하자 회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처리할 폐수가 없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폐수 처리 시설도 필요 없죠.’ ‘그렇습니다. 오늘 저의 결론은 바로 그겁니다. 폐수 처리 시설을 만드는 데 고심하지 말고 차라리 폐수를 줄이십시오’” (손욱, 『변화의 중심에 서라』). 이 이야기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관점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러한 관점의 변화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기업체의 사장은 폐수 시설을 증설할 계획을 포기하고 폐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문제의 초점을 전환함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 문제들도 사실은 이와 같은 방식의 해결이 필요합니다. 이를 오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저녁노을(모니카)






♬ 임의 노래 4집 5. 당신 삶은 하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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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새로 난다는 것.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난 다는 것. 말은 쉽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하고,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날 수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새로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소서! 성령님!”하면 “새로 나게 하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 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 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활동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내어나는 것이 됩니다. 땅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나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볼 눈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면 결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일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적인 이해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고…,

    어머니 뱃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새로 난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은 교회 성사에 연관된 종말론적 성취의 두 가지 표상들을 가리킵니다. 물은 구약성서에서 축복 혹은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상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 주리라”(요엘2,28). 영광 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 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런데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

            (웃자고 한번 해봤습니다요^^)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조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사륵스)입니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하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킵니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 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상처받은 인간성은 허약함과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육의 이해력은 니코데모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갇힌 범주들 및 이해들의 세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신비들을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실재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그리스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와 마찬가지로 “바람” 혹은 “숨 기운”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성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성의 생명의 원천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운명에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변형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과 영으로서의 삶은 짐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방식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프네우마”의 뜻인 “숨 기운” “바람” “영”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창2,7).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거역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생명의 새로운 프네우마(영)의  그림자입니다. 성령(프네우마)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바람처럼 불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면서 원하시는 대로 오고 가시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남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내 틀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때, 나는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끼고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틀을 가지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면 틀리거나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할 때나, 그분께서 원하실 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새로 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나고 싶으십니까?

  2. user#0 님의 말: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새로 난다는 것.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난 다는 것. 말은 쉽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하고,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날 수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새로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소서! 성령님!”하면 “새로 나게 하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 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 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활동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내어나는 것이 됩니다. 땅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나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볼 눈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면 결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일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적인 이해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고…,

    어머니 뱃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새로 난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은 교회 성사에 연관된 종말론적 성취의 두 가지 표상들을 가리킵니다. 물은 구약성서에서 축복 혹은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상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 주리라”(요엘2,28). 영광 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 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런데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

            (웃자고 한번 해봤습니다요^^)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조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사륵스)입니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하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킵니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 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상처받은 인간성은 허약함과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육의 이해력은 니코데모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갇힌 범주들 및 이해들의 세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신비들을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실재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그리스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와 마찬가지로 “바람” 혹은 “숨 기운”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성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성의 생명의 원천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운명에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변형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과 영으로서의 삶은 짐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방식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프네우마”의 뜻인 “숨 기운” “바람” “영”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창2,7).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거역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생명의 새로운 프네우마(영)의  그림자입니다. 성령(프네우마)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바람처럼 불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면서 원하시는 대로 오고 가시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남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내 틀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때, 나는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끼고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틀을 가지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면 틀리거나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할 때나, 그분께서 원하실 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새로 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나고 싶으십니까?

  3. user#0 님의 말: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

    지난 주에는……..
    일년에 한번도 가지 못했던 등산을 두 번 씩이나 갔었습니다
    그것도……..
    한번은 성 금요일….
    한번은 부활 대축일….
    등산을 가면서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당신께 죄송했지만…..
    아니!
    성금요일에는 정말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인들과 모임을 한지 10여년동안 놀러 갈때마다 성당에 행사가
    있거나 사순시기 아니면 망년모임을 할 때도 구역성탄판공을 할때여서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십 여년을 지내다보니 모임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
    어쩌다 모임을 참석하게 되도 구역반모임을 하는 날이어서 회비만 내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함께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기름에 물 돌 듯이
    나중에는 회원 중에 상을 당하는 사람이 있거나 자녀들이 결혼을 해도
    저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아 실수 아닌 실수를 여러번…..
    그러자니 어쩌다 모임을 가도 서먹서먹하고 저 만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눈짓 발짓등으로 신호를 보내니 저는 바보아닌 바보가 된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야유회를 간다고 하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등산을 하면 참석하겠다고 관광은 멀미를 많이 해서 가지 못한다고……..
    처음으로 회원들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모두들 찬성을 하고 날짜는
    자기들이 정하겠다고 꼭 참석을 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에 대담을 하고나니
    등산을 가는 날이 하필이면 성금요일인 4월6일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두들 갈수 있는 날짜가 6일날이 모임이니 핑계를 댈수 없다고……..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성금요일인 4월6일에 등산을 가게되었습니다

    주님!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니!
    그래도 문제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어떤 때에는 외인들보다 신앙인들이 더 못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세속에 살면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살면서 세속의 사람들과 마찰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요즈음 더욱 깨닫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저에게 문제가 더 많다는 사실을…..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족한 사람인지를………
    공동체 안에서 불목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외인들과 생활하면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
    물과 성령으로……..
    당신께서 원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복음을 묵상하고 성서공부를 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저의 생활은 변화 된 것이 없는 것같아 슬픕니다
    어떤 때에는 예전보다 더 못한 저를 보면서 당신의 자녀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말씀을 깊이 새기며 마음과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일치할수
    있는 사랑이 저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앙따로 생활따로 ……..
    판에 박은 생활이 아닌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헬레나가
    되었으면 하는 오늘입니다
    마음과 뜻이 일치하며 당신을 믿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한
    나날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슬픔은 멀리가고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날만 저에게 오기를 간절히…..
    아멘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묵상하며

  4. user#0 님의 말: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

    지난 주에는……..
    일년에 한번도 가지 못했던 등산을 두 번 씩이나 갔었습니다
    그것도……..
    한번은 성 금요일….
    한번은 부활 대축일….
    등산을 가면서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당신께 죄송했지만…..
    아니!
    성금요일에는 정말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인들과 모임을 한지 10여년동안 놀러 갈때마다 성당에 행사가
    있거나 사순시기 아니면 망년모임을 할 때도 구역성탄판공을 할때여서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십 여년을 지내다보니 모임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
    어쩌다 모임을 참석하게 되도 구역반모임을 하는 날이어서 회비만 내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함께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기름에 물 돌 듯이
    나중에는 회원 중에 상을 당하는 사람이 있거나 자녀들이 결혼을 해도
    저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아 실수 아닌 실수를 여러번…..
    그러자니 어쩌다 모임을 가도 서먹서먹하고 저 만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눈짓 발짓등으로 신호를 보내니 저는 바보아닌 바보가 된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야유회를 간다고 하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등산을 하면 참석하겠다고 관광은 멀미를 많이 해서 가지 못한다고……..
    처음으로 회원들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모두들 찬성을 하고 날짜는
    자기들이 정하겠다고 꼭 참석을 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에 대담을 하고나니
    등산을 가는 날이 하필이면 성금요일인 4월6일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두들 갈수 있는 날짜가 6일날이 모임이니 핑계를 댈수 없다고……..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성금요일인 4월6일에 등산을 가게되었습니다

    주님!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니!
    그래도 문제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어떤 때에는 외인들보다 신앙인들이 더 못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세속에 살면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살면서 세속의 사람들과 마찰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요즈음 더욱 깨닫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저에게 문제가 더 많다는 사실을…..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족한 사람인지를………
    공동체 안에서 불목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외인들과 생활하면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
    물과 성령으로……..
    당신께서 원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복음을 묵상하고 성서공부를 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저의 생활은 변화 된 것이 없는 것같아 슬픕니다
    어떤 때에는 예전보다 더 못한 저를 보면서 당신의 자녀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말씀을 깊이 새기며 마음과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일치할수
    있는 사랑이 저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앙따로 생활따로 ……..
    판에 박은 생활이 아닌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헬레나가
    되었으면 하는 오늘입니다
    마음과 뜻이 일치하며 당신을 믿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한
    나날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슬픔은 멀리가고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날만 저에게 오기를 간절히…..
    아멘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묵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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