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지금은 죄인이 아닐지라도,
전에는 죄인이었고 언제라도 죄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인을 벌하지
않고 그대로 두시는 하느님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죄인이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그런 교회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리 없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메시아, 즉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시대는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입니다.
하느님을 옹졸한 복수자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은 죄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의인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셨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니까 어떤
사람이든지, 비록 죄인일지라도 구원의 길은 열려있습니다.
가라지가 좋은 씨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표시하는 것이니, 비난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하인들이 주인께 가라지를 뽑아버리겠다(28 참고)고
말합니다. 신자들이 죄인을 용납하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즉시 처단하시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보다도 자신들의 잘났음을 과시하거나 죄인이 없는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교회의 이익과 하느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낸
분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을
없애주기를 바라고 있는 동안에 사탄은 우리 마음에
가라지를 뿌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나 보고만 계시지는 않습니다.
가차없는 심판의 날이 곧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행위를
하는 신자라야 구원됩니다. 신앙행위를 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계명’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곡간에 가게 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가 하느님의
밀밭을 풍요롭게 합니다. 사랑만이 회개를 가장 잘 유도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 참으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에게 관대한 마음과 자신에게 엄격한 마음을 동시에
지니기 위해서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께 기도하면, 죄인이 교회에 섞여있는 이유를
가르쳐주실 것이고,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희망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외유내강(外柔內剛)하는 삶의 태도로 냉담자들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노력합시다.
-김경식 신부님 강론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