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말씀하시는 것은 빈말만 되풀이하는 이방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이교도들은 기도하는 말에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알 수 없는 기묘한 문구를 큰 소리로 빨리 외우면 외울수록 神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하나의 실례는 회교입니다. 회교도들은 “알라의 신 외에 신은 없으시다”라는 말을 쉬지 않고 되풀이합니다. 엣싸나라는 가장 열성적인 회교도는 하루에 12,600번이나 이 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기도드리는 이의 자세나 정성을 문제 삼지 않고, 그 말의 수효나 외치는 목소리의 크기와 빠름에 일종의 마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이방인의 편견을 예수님께서는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짧거나, 길거나 다만 거기에 정성이 깃들여 있다면 훌륭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게쎄마니에서 똑같은 기도를 되풀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탄식과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협박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우리의 기도로 속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들어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다만 청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청을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드리는 이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이 말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의 서문이다. 하느님을 창조주 또는 왕이라고 부른다면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도 깊게 다가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간격을 좁혀주셨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듯 그렇게 다가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그립고도 따뜻한 이름으로 부르게 하셨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진실로 형제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 우리 아버지”라는 짧은 말 중에는 하느님의 父性과 인간 상호간의 형제애라는 가르침의 커다란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아버지란 제자들이 단체로 기도할 때 부르는 이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나의 아버지시여” 또는 “아빠(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의 아버지”라고 부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까지도 내어주신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이초자연적인 은혜를 요한 금구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인간은죄의 용서, 벌의 폐지,정의, 성화, 구원을 선언하고, 인간을 그 외아들의 형제로서 상속인으로 삼는 양자(의 신비)와 성령의 선물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교육 단체에 가서 개사한 노래를 하다보니 “예수 형님!”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했으니 예수님은 당연히 우리의 형님이 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창조주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니 기도를 바칠 때 “예수님의 분부대로 감히 당신을 아버지라 고백하오니”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형님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더욱 엄청난 특전이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적이 없으니 그런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이름”은 그 이름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하느님 자신을 말한다. 예수님의 기도의 첫째 소망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부르게 하는 일이다. “거룩하다”란 악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과, 모든 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는 악이 없으며, 무한한 완전과 선으로써 충만 된 분이심을 긍정하는 것이다. 하느님, 혹은 그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룩한 분으로서 인정되시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쓰며,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존중하도록 할 의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미 건설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하고 기도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 인류의 마음을 통치하실 때까지, 이 소망을 계속하여도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발전은 영광에 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 날까지 계속할 것이다.
이 나라의 또 하나 특징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동시에 또 하나의 사회로서 구체적으로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이며 사랑에 찬 복종에 따라 먼저 인간 정신 안에 세워져야 한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남을 통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언제 전 인류의 마음에 들어오시며, 전 인류에게서 신앙과 사랑의 가장 깊은 생활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그 날까지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하고 기도해야 한다. 모든 영혼 안에 아버지의 위대한 지배가, 아버지의 나라가 깊고 넓게 퍼질 것을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도 전력을 다하여 전 인류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퍼지고, 정의와 평화와 행복이 깃들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커갈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커가야 한다. 하느님의 뜻과 긴밀하게 일치하는 천사나 성인들과 같이 충실함과 사랑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모든 것이 부족하여 모든 것을 받아야만 하는 가난한 아들들이 먼저 아버지를 생각하고, 다음에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었던 청중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빵이었다. 그들은 어쨌든 오늘 먹을 빵을 가지고 있다면 영혼의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돌릴 것이다.
예로니모에 따르면, 히브리인이 사용하고 있던 복음 중에 “일용”에 해당되는 말은 mahar(내일)이다. 그렇다면 “내일”의 빵을 오늘 구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일을 위하여 쓸 데 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6,34). 그런데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오늘은 어제부터 시작된다. 어제 해가 떨어지면 오늘이 시작되는 것이고, 오늘 해가 떨어지면 내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자리에 누워서 내일 먹을 빵 걱정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그런데 참된 제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에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이기적이거나 편협하게 기도하면 안 된다. 필요한 양식은 매일 필요로 하는 빵이다. 그리스도인은 필요한 것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큰 것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아주 작은,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잘못”이란 구약 성서나 탈무드의 표현법에 따르면 “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을 상대로 하지 않는 루가는 “잘못”이라고 쓰지 않고 “죄”라고 바꿔 쓰고 있다.
죄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법률과 완전성에 대한 “결여”와 “부채-빚”을 의미한다. 이 빚은 우리가 자본과 이자를 이용하여 얻어야 할 하느님이 영광의 “결여”를 뜻한다. 예수님의 비유에 여러 번 나오듯이, 우리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불할 수 없으나 채권자에게 애걸하여 면제를 받는다는 방법이 있다. 다행히 우리의 채권자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떤가에 따라서 완전히 면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그것은 타인의 부채를 용서하였느냐, 용서하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 결과를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18,23-35)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드리는 신자는 형제의 부채가 많던 적던 상관없이 용서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의 부채도 용서 받을 것이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이 기도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시다(야고1,13)
성서에 나오는 유혹이라는 말은 덕을 행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기회, 곧 시련을 뜻하지 악으로 유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시련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이겨낸 공덕도 크게 된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도 이런 의미를 지닌 유혹이었다.
그런데 이 기도는 “하느님! 열심한 유다인들은 유혹을 당당히 이겨내서 공로를 쌓아 당신께 칭찬을 받게 되지만 저는 유혹이 다가오면 백발 백중 넘어집니다. 저에게는 공로 쌓을 기회를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말은 악마가 나를 가지고 좌지우지 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나는 악마와 싸워 당당히 승리할 힘이 없는 나약한 자이기 때문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은 초대교회에서 사제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주의 기도를 드리면 그 마지막에 일동이 찬성한다는 의미로 “아멘”(그렇다. 그렇게 되어지소서…)이라고 외치는 습관이 있었다. 로마의 대성당에서 일동이 다 같이 외우는 “아멘”소리가 천둥과도 같이 울렸다고 예로니모 성인은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잘못은 실수라든가 과실이라는 뜻으로 죄의 일면을 말한다. 그리스말에서는 자주 사람이 저지르는 가벼운 죄를 가리킨다. 이 절은 적극적이며,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하느님의 용서를 정확히 받고자 한다면, 이웃을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