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말씀연구>
참으로 멋진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 제도는 에스델 시절(기원 전 5세기)의 것인데,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이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유다 국민의 지도자로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를 이은 자들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위기의 미드라스(해석)에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한 율법학자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하면서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결례, 안식일, 단식과 기도 등을 생각해 보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번잡한 규정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누르는 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 자신은 겉으로는 신심을 가장하면서도 자기네를 위해서는 그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 번째 죄는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위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허영심을 꼬집으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
보여주기 위한 것, 남에게서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것. 명예로운 호칭을 좋아 하는 것. 이것은 허영심의 결과입니다. 성구 넣는 갑은 그리스 말로 부적이라는 뜻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미신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구 넣는 갑은 조그만 갑인데 그 속에 출애굽기 13,1-10. 11-16 그리고 신명기 6,4-9;11,13-21절 까지의 글귀를 양피지에 써서 넣었습니다. 작은 갑은 왼팔이나 이마에 달고 다녔는데 지금도 히브리인들은 기도할 때 그것을 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명기 6,8절의 그릇된 해석에서 나온 습관 같습니다. 거기에는 야훼의 계명에 대하여 쓰여 이는데.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로니모는 이 말씀을 상징적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로니모 당시 이 관습은 인도, 페르샤, 바빌론의 유다인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미신적인 것으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바리사이파 사람의 미신과 허영심은 사람의 눈에 돋보이도록 일부러 크게 만든 갑과 술에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자리는 나이의 차례에 따라 앉게 정해져 있었으나, 위엄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 순으로 정해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영 다툼의 근원 같습니다. 자리 그 자체에 위 아래를 정하는 것은 질서를 잡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명예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윗자리 다툼인 것입니다.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란다.
히브리인 사이에서는 인사를 받는 사람을 마음과 이마와 입에 새겨 두고 싶다는 그런 뜻으로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동그라미를 그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원말은 “라브”(스승), “라삐”(나의 스승), “랏방”(우리의 스승)입니다. 라브는 기원 전 2세기 말, 현재 말하는 박사, 선생 등의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기원 후 1세기 말에는 “라삐”라 하고, 일반적으로 팔레스티나의 선생을 가리켰습니다. 그 무렵 로마 정부가 인정한 유다의 으뜸은 “랏방”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께서 존칭을 절대적으로 배척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만을 노리는 명예심과 오만을 배척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분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적 겸손을 기르기 위한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오직 한 분의 스승은 하느님뿐이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현명하다 하더라도하느님의 높은 지혜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라는 표현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 사이의 보편적 형제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브라함, 이사악과 야곱 등 세 조상에게만 사용되었고, 어머니는 사라와 리브가와 레아와 라헬에게만 붙였던 존칭입니다. 그 후 “아브”,“앗바”(아버지)를 유명한 사람이나 학자에게 붙였습니다. 라삐 이스마엘과 라삐 아키바는 세상의 아버지라 존경을 받고 그렇게 불렸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밑에서는 모두가 형제이고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 형제라는 것을.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그리스 말로 지도자는 “주”란 뜻이 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이 말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다인들은 처음으로 이런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는 선생의 일꾼입니다. 제자의 일꾼이 되는 선생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참된 영광으로 가는 길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