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면 자유롭다고 말씀하시는데….오히려 부자유스럽다는 것을 왜 모르실까요? 저는 가끔은 “그 말씀은 몰랐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알면서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알면서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산다면야 달라지겠지만…
31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으로 말씀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투신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습득하며 또한 간직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예수님과 인격적 친교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는 일시적인 감격, 감동에서 오는 선량한 행동, 신심 행위 등으로는 모자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한번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덕은 내 몸에 완전히 자리 잡아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의 신앙이 덕이 될 수 있도록, 내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2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는 인간의 추구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구원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가르침, 곧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예수님의 말과 행동으로 이 세상에 드러낸 종말론적 구원 계시를 가리킵니다. 진리를 “안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진리를 내적으로 받아들여 간직하고 실현함을 뜻합니다.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은 약속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구원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가르침이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어 구원으로 이끌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과 아버지는 일치되어 있으며, 그 일치된 친교 안에 자기 자신이 받아들여짐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유롭게 한다”라는 것은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인간이 추구하여 얻는 그런 자유가 아니고, 믿는 자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자유, 곧 인간적 실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즉 죄와 죽음의 영역, 곧 이 세상의 비 구원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서 실존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라는 미래적 표현은 미래 종말론적 약속만이 아니라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33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한데도 종살이를 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유대인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종이 되지 않았습니다(레위25,39-42). 따라서 “죄의 노예”임을 지적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자기네의 종교적, 민족적 긍지와 명예가 훼손된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악의 굴레에 빠져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죄를 짓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거스르고 하느님의 구원 선물을 거부하는 것과 인간의 이기적 고집 속에 머물고 자신을 폐쇄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죄”는 하느님을 등진 인간의 완고한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님을 증오하고 믿지 않는 일체의 행위가 내포된 개념입니다. 일부 사본에는 “죄의 종” 대신 “종”으로 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를 짓고 어떻게 노예가 되는 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본성에 의지하지 않고 남의 감화 밑에서 행동하는 경우, 그것은 노예적인 것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이성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따라서 곧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경우는 자신의 이성에 거슬리고 그것이 남의 감화 밑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죄를 짓는 것은 곧 죄의 노예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노예와 아들의 입장을 설명해 주십니다.
35 노예는 자기가 있는 집에서 끝내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그 집에서 살수 있다.
종들은 한 가정 안에서 살다가도 추방되거나 팔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 대한 약속에 우쭐하여 자신들의 내세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진정한 “아들”이 아니라면 하늘나라에서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다.
아들은 종말론적 구원자로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만이 종말론적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생각해 봅시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으나 노예인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인의 여인(사라)에게서 난 다른 아들(이사악)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창세21.10).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한 단계 낮은 현세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참 뜻은 타민족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계시가 믿는 이들을 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임을 확인시키시고, 더욱 명백하게 설명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37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너희에게 내 말을 받아 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구세사의 의미와 아브라함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자리 잡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가 머물면서 생동력을 발휘함을 가리킵니다.
유다인들이 주장하는 자유에 대한 것을 반박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칭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을 도마위에 올려 놓으십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좋으나, 만일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까지 제 일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켰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를 선포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결코 아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따르기 보다는 악마의 정신을 받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나는 나의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일러 준 대로 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아버지와 유대인의 아버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유대인의 아버지는 악한 사람이니 지금 이들이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니 그들에게는 모욕적인 말이 됩니다.
모욕을 느낀 그들은 발끈하여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39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대로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한 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과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사악과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동족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 아브라함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이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쉬는 교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이 믿었다가 좀 쉬고, 좀 쉬었다가 믿고…그럴 차원은 결코 아닙니다.
모욕을 느낀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41 “우리는 사생아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음행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선택된 백성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매음행위라고 간주하였습니다. 우상숭배를행하는 범죄자는 “매음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호세아1,2;2,4)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이방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고 고집부리고 있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 예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 와 있으니 만일 하느님께서 너희의 아버지시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주장은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과 맺어져 있다면 그들은 하느님께 관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으신 에수님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참조: 요한 5,1)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나와 마찬가지로…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나는 말씀 때문에 자유를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구속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있습니까?
2.信信信信(신앙인이면 다 신앙인이냐, 신앙인답게 살아야 신앙인이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면서도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예수님의 반대자들,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와는 전혀 닮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 신앙인 답지 못한 행동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에디시: 유대인들은,아무리 가난해도,종이 되지 않았나여? [04/08-18:26]
에디시: 바빌론유수는 먼가여??이집트로 끌려갔던건여?? 궁금함.. [04/08-18:28]
니콜라요: 제 생각은요 여기서 자유란 악으로 부터의 자유죠. 명예 재물 지위 음란 게으름 등등 수도 없는 악으로 부터의 자유를 말씀하신것 아닐까요? [04/09-12:17]
요한 신부: 유배는 하느님의 벌이구요. 유다인들은 유다인을 종으로 영원히 데리고 있을 수 없었지유. 땅도 마찬가지였구유. 어느 기간이 되면 다시 돌려 주고, 또 자유인이 되었지유. [04/09-13: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