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육과 영에 대한 이해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말씀연구>


새로 난다는 것. 경요셉 주교님께서는 인사를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라고 인사를 하신다. 그런데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웃자고 한번 해봤습니다요)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2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3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활동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내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적인 이해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조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사륵스)입니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하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킵니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 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상처받은 인간성은 허약함과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육의 이해력은 니고데모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갇힌 범주들 및 이해들의 세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신비들을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실재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그리스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와 마찬가지로 “바람” 혹은 “숨 기운”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성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성의 생명의 원천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운명에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변형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과 영으로서의 삶은 짐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방식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프네우마”의 뜻인 “숨 기운” “바람” “영”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창2,7).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거역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생명의 새로운 프네우마(영)의  그림자입니다. 성령(프네우마)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바람처럼 불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면서 원하시는 대로 오고 가시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남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은 교회 성사에 연관된 종말론적 성취의 두 가지 표상들을 가리킵니다. 물은 구약성서에서 축복 혹은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상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주리라”(요엘2,28). 영광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새로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나고 싶으십니까?




211.110.140.87 요한 신부: 어려워도 꼭 보세요. 내일 또 이어집니다…. [04/28-10:30]
211.242.123.176 천사01(안나): ^^*어려웠는데 신부님께서 재미있게 풀이해 주셔서 재밌게 읽고 묵상해 봅니다 . [04/28-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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