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오늘 1독서 판관기 말씀 안에 나오는
‘입다’ 장군과 그의 딸을 보니 여러 생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원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하늘을 두고 맹세한 말이
얼마나 큰 댓가를 요구하는지 바라봅니다.
그 기막힌 일을 담대하게 받아 들이는 딸의 태도는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하느님께 드린 말씀이니 꼬옥 지켜야 한다는 딸의 신심이
마치 순교를 열망한 사람 같구요.
딸은 아비를 원망하거나 제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저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두 달간의 말미만 주시고 아버지께서 말씀 하신대로 행 하십시오.”
두 달이 지나자 입다는 말 한대로 행하였다.
“휴우!”
주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께 희생을 요구하셨을 때는 믿음을 보시고
이사악의 번제를 관면하셨는데,
입다가 스스로 말한 재물에는 관면없이
번제를 받아 들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입다의 원망인가요?
아니면 남의 생명은 예사롭게 보고
자신의 가족일 때는 애통해 하는 이기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대속의 차원입니까?
주님!
하느님을 두고 한 맹세는 반드시 지키는 그분들의 믿음이 장엄합니다.
계명을 지키듯 말입니다.
안나는 언제쯤이면 말에 대한 책임을질까요?
청강생: 하느님을 두고 한 맹세…함부로 해서는 안되겠지요.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려고 당신이 스스로 원하셨던 제물인이삭… 그리고 감정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입다의 딸…두사람의 제물은 차원이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입다는 판관이면서 하느님이 뭘 원하시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 하고 함부로 하느님을 걸고 사람을 제물로 받치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건 살인인것이지요 사람이 사람을 죽일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지나친 믿음은 광신자을 낳지요. 요즘 그런일 많지 않습니까…
영생교 사건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들에 모습에서 도 볼수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때 하느님께 드리지도 못할 헛 맹세를 함부로 하는걸 요즘도 자주 보지요.특히 감정을 건드리는 성령세미나 기도회..부흥회등 에서 흔히 볼수 있지않나 싶네요. 입다…그분의 결정은 잘못된 감정이 북 받친 맹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신부: 맞습니다. 맞고요..아브라함의 순종과 입다의 맹세는 다릅니다. 전혀 다릅니다. 오늘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맹세나 약속등에 대해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왜 입다의 딸을 번제물로 받으셨을까요? 하느님께서 무자비하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보시기에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입니다. 그분께는 내가 지상에서 죽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더라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입다의 번제물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교육하십니다. 하느님께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맹세를 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또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런 사람의 번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 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 그 이후로 어느 누구도 그런 맹세 드린 적 없을 것 입니다.
안나: 번제도 속죄제도 초월해 진정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라”시는 말씀을 살도록 안나도 노력하겠습니다. 죽음도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이라셨으니, 우리들의 성소인 사랑을 안나가 살도록 기도해주셔요. [08/22-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