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말씀연구>


35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백성들의 목자였지만 그들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사제들이 백성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리 다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목자들이 양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양들도 현대의 교회에는 너무 많습니다.


사제들은 맡겨진 양들을 잘 돌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양들은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추수는 모든 일들의 마무리를 묘사하는 고대적인 표현입니다. 예언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만들어 냈으며,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일꾼이 적습니다. 추수할 사람이 부족한 것입니다. 결단을 요구할 사람들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당신 앞에 펼쳐져 있는 엄청난 추수 일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메시아의 중대한 활동을 돕게 하시려고 당신의 활동에 친히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을 받으셨듯이, 궁극적으로 제자들을 당신 메시지의 봉사자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목자로 세워놓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의 열매들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자는 필요 없는 목자입니다.


밭의 일꾼을 고르는 것은 밭주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실치 않은 일꾼을 물리치시고 성실한 사람으로 당신 밭의 일꾼을 채우실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악마와 모든 병고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할 의무도 아울러 주십니다(마태10,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자기들의 일을 입증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권한과 의무를 생각해 보면서 나는 의무보다는 권한에 더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니 의무에는 관심 없고 오직 권한만을 찾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권한은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5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선교의 대상은 엄밀하게 말해서 이스라엘 나라뿐으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방인들이 구원에서 제외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언자들이 말해 온 것같이 이스라엘의 권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방침을 따르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 유다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방인들에게 퍼져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하십니다.“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해서 왔다”(마태15,2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한을 따르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순명은 하느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우는 작업인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나중에 파견될 때는 이러한 규율이 더 이상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등레게 로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가르쳐라”(마태28,19)




◀사마리아▶


앗시리아 왕들이 이곳으로 이동시킨 이방인의 자손인 사마리아인은(기원전 722-21년) 유다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민족으로서도 또 종교상으로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과는 언제나 사이가 나빴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복음서에 아름다운 예외가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10,25, 사마리아 여인-요한4장), 서로 증오한 일반적은 감정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적대감정은 1세기 말까지 계속되었고, 2세기 로마에 대한 혁명이 끝날 무렵부터 이 반목은 완화되고, 이윽고 같은 종교,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7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선포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똑같이 선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나는 지금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8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새로운 선교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가르침의 진실성은 ‘기적“이라는 하늘의 도장으로써 증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초자연적인 위대한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까지도 다시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선교한다면 확실하게 믿을 텐데….)


사도들은 하늘에서 받은 선물을 이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간다는 것이 대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도 팔레스티나인들은 지갑을 허리춤에 넣고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생활에 방해가 되고, 혹은 섭리에 대한 불신의 표시가 되는 것들, 혹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면서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험을 내포하는 쓸 데 없는 세속적인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가르치십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유다인은 속옷을 두 벌씩 입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만 입는 사람은 아주 가난한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절대적 청빈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열 두 사도들은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대를 이은 후계자들에게는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탁발 수도회의 수도자라도 사람들이 베풀어 주는 빵을 넣기 위한 자루를 가지고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들이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신자들이 무척 힘들어 할 것입니다. 이것도 준비해 줘야 하지, 저것도 준비해 줘야 하지. 바뀔 때 마다 준비해 줘야 하지…


그런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했는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지팡이 쯤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적 청빈. 지팡이 하나 가지고 있다 해서 그것이 결코 사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표현은 다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같은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쓸데없는 것을 가지지 말며 섭리의 계획에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섭리의 계획에 전적인 신뢰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제자들이 받은 사명을 기억하면서 내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의 소유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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