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말씀연구>


말로 따르기는 참 쉬운데 행동으로 따르려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행동이 따르는 믿음, 행동이 따르지 않고 말만 하는 믿음. 제 믿음은 분명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뿐인 믿음이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말하지만 결코 내가 받아들이기  싫거나,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냥 싫은 사람들까지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기적인 마음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할 수 있고, 그래야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서 미운 사람 하나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그런 하루를…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은 자아 부정과 십자가의 수락입니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무조건 참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있어서 장애되는 내 자신의 욕심이나 이기심, 아집등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자구적 의미에서 볼 대 당대의 사람에게만 해당될 수 있었습니다. 즉 이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못 박고 그 위로 들어올려져서 형장의 조롱거리가 될 무거운 들보를 어깨에 메고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걷는 공포의 길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광경은 당대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 은유는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의 마지막 걸음처럼 삶을 감수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목숨의 보존과 잃음에 대한 말씀에서“목숨”이라는 단어에 눈을 돌려 봅시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는 ‘영혼“이라고 하지만 구약성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삶에 대한 의지, 삶에 대한 표현, 인간으로서의 전체적인 삶이라는 뜻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인간 존재 전부를 의미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하느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은 결국에는 자기 목숨을 잃고 절망적으로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보다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장애되는 것을 하나씩 극복해 나간다면 결국 자기 목숨을 구하고 삶의 진실한 목표를 성취할 것입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보면 동생에 대한 형의 지극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형은 사랑하는 동생이 군대에 징집된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함께 군대까지 가게 됩니다. 동생을 무사히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동생과 함께 있으면서 동생을 보호하고, 동생을 제대시키기 위해서 “태극무궁훈장”을 타려고 합니다. 총알이 날라 와도, 포탄이 떨어져도 훈장을 타기 위해서 달려갑니다. 동생을 사랑하는 그 마음. 사랑하기에 동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해 주려했고,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 주려했던 형. 결국 형의 죽음으로 동생은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은 죽었지만 동생의 마음에서 영원히 살아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전하려고 작심하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나라에서 영생을 잃을 것이요, 현재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나라에서 영생을 차지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아람어로 재물을 “마몬”이라 하는데, 그 어원을 풀이하면 “실하다. 믿음직스럽다”이지만 실상 마몬은 “부실하다, 믿을 바 못된다”고도 하셨습니다(루가 16,9-12). 그러므로 마몬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해야만 지금의 삶도, 영생도 보장받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대로 장차 종말에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대하시겠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이다.




9장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1)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이 말씀을 종말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종말의 의미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정의와 힘에 빛나는 표현을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벌하고 혹은 해방하시는 것을 하느님의 방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와 비슷한 하느님의 오심을 볼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문이 언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가? 거룩한 변모, 부활, 성령강림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복임이 전파되고 교회가 설정되는 때, 예루살렘의 멸망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어떤 것이 이익일일까요? 신앙생활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이익일까요? 대충 대충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이익일까요?




2. 내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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