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말씀연구>
이 말씀안에는 두가지의 주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제일 높은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열을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시면 나는 국무총리, 나는 국방부장관, 나는 무슨 장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높은 사람인가를 잘 가르쳐 주십니다.
30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 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죽임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선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군중을 피하고 그들의 주위에서 벗어 나려고 애쓰고 계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생각하시면서 피정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십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일러주셨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메시아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심각하게 말씀을 꺼내십니다.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에 베드로는 완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귀에는 부활보다는 죽음에 더 마음이 가고 있습니다. 스승이 죽는다는 그 괴로운 말만이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예수님의 미래가 그렇다면 자신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날을 모두 알아버린다면 두려움은 더 커질지도 모릅니다. 사실 알고 있다는 것은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다림도 없고, 설레임도 없고, 새로움도 없고, 그것이 주어졌을 때의 행복도 없고. 만일 전부 알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좌우지간 제자들은 어렴풋하게 보이는 미래가 두렵게 다가오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목자들은 신자들을 이용하려 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계시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년을 따라 다녔는데 죽으신다는 그 말씀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말씀.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본당을 걱정하기 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주기 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 본당을 걱정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는 것 같은데 “자신을 위함 다음”에 이루어지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33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 가시자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잘 라삐들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누가 첫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학파에 따라서 그 대답은 달랐습니다. 의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토라와 미슈나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고, 원로나 순교자라고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교회에 대해 위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조직되어 가고 있는 이 단체에 그러한 허영심이 깃들면 그것은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이러한 위험한 생각을 빨리 제거해 주십니다.
부끄러운 사도들. 어제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해서 창피를 당하더니 이번에는 자리싸움을 해서 창피를 당하고 있으니…
35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다음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손수 보여주십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겸손의 정신을 익히고 남을 섬기는, 절대적인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36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 들이면 곧 나를 받아 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바로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그리이스 말에는 “생각을 바꾸어라”는 동사에 “변하다, 개심하다”라는 재미있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된 제자는 어린이의 특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세.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자신과 동등한 자리에 놓고 계십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고아를 받아들이거나 보호해 주는 것은 랍비들이 권장하고 찬양한 선행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했을 때, 제자의 신분과 형제애의 정신으로 했을 때, 그것은 곧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의 기본 법칙입니다. 그런데 유혹이 시작됩니다. 있는 사람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줍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손해를 보는 이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가 비록 보잘 없다 할지라도 그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사순시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어떤 것을 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2. 높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낮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