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할 때야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의 경우는 분명 그렇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가족을  사랑하느냐? 내가 얼마만큼 배우자를 사랑하느냐? 그것은 분명 실천으로 들어날 것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세상에는 궁금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모르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나 어른을 만났을 때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게 됩니다. 많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지만 오늘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보다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유다교의 계명에는 613개가 있었습니다. 248개는 명령이고 365개는 금령입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어떤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쾌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른이 된 남자 유다인이 매일 아침 외우던 중대한 기도의 시작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히브리 사람들의 심리학에서 지혜가 담긴 자리였습니다. 목숨을 다하고는 정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물리적인 모든 열정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내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느냐가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느냐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뒤집에서 생각해 보면 이웃 사랑의 척도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가 내가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하느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기쁨이 따라오고 기쁨이 열매 맺으면 평화는 당연히 열매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열매 맺으면 이웃 사랑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 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좋을 때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더 나아가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내가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로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율법학자는 이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둘째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친구들, 동료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안과 이방인 그리고 유다인, 세리와 죄인 그리고 생활이 문란한 여인과 의인이라고 보여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친구, 적 모두가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개념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런 구별 없이, 종교, 지위, 남녀노소 등을 떠나 모든 이가 이웃이고, 우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필요한 경우 용서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율법 규정을 십계명으로 환원하셨고, 십계명은 다시 이렇게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결국 사랑의 이중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요즘 일어나는 배우자 살인 사건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배우자를 죽이는 일. 어찌 보면 그렇게 살해하는 것만이 죽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 나만 생각하는 말들. 배려하지 못하는 작은 행동들. 이런 행동들 하나 하나가 배우자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 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학자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었습니다. 율법학자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의식보다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의하구요. 그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따랐고(예레미야7,21-23;호세아6,6) 예수님은 그의 결론에 칭찬을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율법학자들의 동료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니 다른 사람은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향했으면 좋으련만…








<함께 생각해 보아요>


1.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물었다면 시원한 답을 얻으셨는지요.




2. 예수님께서는 슬기로운 율법학자에게 축복을 내리십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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