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진복선언
■틀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가에서는 평지에서 계셨다로 나와있다. 복음을 전해주는 복음기자는 예수님을 어떻게 봤느냐에 따라 전체 시각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배치한다. 즉 틀에 담아서 전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교회를 크게 보기에 전 단계로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우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16장에 가서 대대적으로 복음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탄탄하게 교회를 세운다. 반면 루가는 먼저 산 위에서 열두 사도를 뽑아 교회의 기반을 세우신 다음 내려와서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5,1절은 하나의 틀이며 틀을 통해서 마태오의 신학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산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고 왜 이렇게 배치했느냐가 중요하며 그것은 바로 마태오의 사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먼저 산의 의미를 보면, 상징적으로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는 자리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는 자리가 바로 산이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계시를 받은 것처럼 마태오는 예수님을 모세처럼 바라본 것이다. 유다인들이 최고로 존경하는 그분 이상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축복의 말씀
축복의 말씀들은 이미 구약성서 특히 지혜서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지혜의 규범을 따라 그들의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찬양한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축복의 말씀이 이인칭으로 나타나는 곳은 극히 드물다. 반면 신약성서에서는 이인칭이 나타나는데 이 이인칭의 말은 예수님이 한 말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3인칭으로 쓰인 이유는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의 원래의 형태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은 어떠한 사람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조건이 더 이상 제시되지 않는다. 누가 구원을 받느냐가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 배고픈 자 및 우는 자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고 있다. 마태오는 3인칭을 사용하는데 비해 루가는 2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역사의 예수님은 2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먼저 예수님이 말한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프고 짓밟히는 사람들이었다. 즉 종이 주인한테 대들면 맞아 죽던지 팔리던지 이런 상황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축복하셨다. 그런데 마태오가 보기에는 이제는 그 순박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는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마태오는 가난한 자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재산은 많아도 하느님을 공경하며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며 사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마태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사 61,1-2이 실현되었구나 하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루가의 가난 개념은 구약성서의 가난 개념이다. 즉 하느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루가도 전해 주다보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즉 예수님 시대와 상황이 달랐다. 그럼에도 루가는 뜻이 안통해도 그대로 전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루가도 지금이란 말을 집어넣어 설명한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장차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슬피운다는 것이다. πενθεω 라는 단어의 뜻은 바로 자기 어머니가 죽어 통곡하는 것을 의미한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슬픔, 가혹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슬픔, 그리고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 그리고 이 눈물에는 유혹이나 죄를 용서받은 것 때문에 흐느끼는 슬픔의 눈물(예수님의 부활을 본 뒤 자기 죄를 뉘우치며 불행한 상태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형태가 바로 통곡)도 엉켜 있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을 예로니모와 레오는 “남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 자기 죄를 슬퍼하는 사람(암브로시오)”을 말한다고 한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메시아가 가져다주는 행복 때문만이 아니라, 그 슬픔의 교훈으로 현세를 떠나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하며 그리스도교의 희망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근심스러운 눈초리와 우울한 낯빛과 절망스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놓고 예수님께 위로를 청해야 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역경이라는 인생의 학교에서, 생명의 가치를 배운 사람은 정녕 행복하리라(참조: 집회서 34,9, 마태11,29)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아람어에서는 이 두 단어가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모두 검소하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압박하거나 착취하지 않으며, 복수를 하거나 폭력으로 목적을 성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회적 불의를 증오하시고 오만한 박해자를 단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이사 61장에 보면 유배중이고 땅도 다 빼앗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고 이제 하느님밖엔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상속받으리라는 것은 온유한 자가 언젠가 얻게 될 땅은 하늘나라와 다른 것이 아니며 이 하늘나라는 새로운 땅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루가 6,21에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상황이 다르기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지금을 빼고 “옳은 일”이라는 말을 넣었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한 표현은 성서적 표현이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미 구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아모 8,11)과 은혜(이사55,1-2)및 하느님의 현재함(시편42,3)을 동경하는 것에 대해 자주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대상은 개종한 유다인들이었다. 그러기에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했고 구원에 목말라했던 것을 예수님이 채워주셨구나 하고 보기에 자연스럽게 목마르다는 표현이 들어간다.
하느님을 믿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난을 감수하고, 고통을 참으며 역경 가운데에서도 인내하는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며 그분의 섭리와 정의의 질서에 협력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는 예수님 말씀과 삶의 핵심이었다. 신약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자비는 마태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선포의 중심이 되는데 이것은 율법의 성취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즉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셨고, 율법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하느님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스스로 자비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마태18,30)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은 정결을 강조했는데 깨끗하다는 것은 유다인에게는 중요한 삶의 내용이었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도 손을 씻고 먹었다. 깨끗해지는 방법은 더럽혀진 몸을 예식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있고, 마음이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정결례에 대한 것은 신약입문편을 보시오)
유다인들의 마음은 항상 그 존재의 기초를 말하는데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마음이라고 했는데 이 마음에서부터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 선과 악이 나온다. 따라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향한 순진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종말론적 개념으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로선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하느님을 직관하는 것(이사6,5-큰일났구나.이제 나는 죽었다.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은 종말의 때를 위한 약속이며 이 종말의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순수한 친교가 이루어지며 이 친교는 지금은 다만 천사들에게만 허락되어있는 것이다. 실제로의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신앙이 희망하는 것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궁극적인 성취이다. 결국 행복을 이루어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이런 모습으로 여기서 표현한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는 최고의 축복이요 은혜였다. 즉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평화에 담겨져 있다. 예수님도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 있기를” 이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도 활동의 특별한 임무인 것이며, 그것은 바오로가 말한 화해시키는 임무이며 화해의 이치를 전하는 임무(2고린5,18-21)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존재이고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나온 존재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은혜인데 최후 심판 때 영원한 생명으로 주는 것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종말론적 하느님의 축복이다. 그러기에 주의 기도를 하기 전에 삼가 아뢰오니 라는 말이 아니라 “감히 아버지라 아뢰오니”가 합당한 것이다. 마태오의 시대에까지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구약성서의 전통 안에 여전히 서 있었는데 이 전통에서는 분에 넘치며 은혜로운 계약에 관한 지식이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억제시켰고 요한은 처음부터 용어를 다르게 썼다. 즉 예수님은 아들 υιοS로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 ΤεΚνα로 표현한다. 그리고 바울로는 우리가 다만 그 아들을 믿든 자로서 그의 영에 동참함으로써만 아들들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해준다(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보내신 영에 의해 우리가 영으로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얻어 맞아가면서도 싸움 말리고 화해시키는 사람이 아닐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박해는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유다인들의 행복관이었고 박해받는 자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사실이 예수님 당시 널리 유포되어 강조되고 있다.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편들을 알고 있었기에 (시편22;34,20등)신약에도 내려와 후기 베드로전서에도 義를 위한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을 수 있다.
모욕이라는 그리스말(오네이디소신-오노스-당나귀, 에이도스-꼴, 모습)은 글자 그대로 나귀의 모습, 나귀 머리라고 하는 듯으로 심한 모욕이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박해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 대한 박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인들이 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기에 오는 것들이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 그것은 중상 모략이다. 영혼을 지닌 사람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중상 모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시며 그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을 참아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러 모욕, 이런 고통도 참아야 한다.
예전에 한 여인이 있었는데 남편한테 얻어맞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편이 성당에 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이랑 사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는데 성당에 나가지 말라니 당신이랑 그만 살아야겠군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놀래서 마침내 그도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확실히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