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칼 장수? 예수님 때문에 사실 기쁨도 크지만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이상 고통과 번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 때문에 가끔은 마음이 평화롭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몰랐더라면 하지 않을 고민들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민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메시아의 재림에 앞서서, 산고(産苦)에 비유되는 재난과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평화 그 자체이신 메시아가 재림하신 그 때부터 모든 것은 질서와 평화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이 유다인의 전통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은 싸움이나 전쟁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 기회이십니다.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인간을 둘로 갈라놓고, 서로 다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환영한다면 큰 행복과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를 적대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어둠의 자식은 빛의 아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걸어 올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도 어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빛에 속한 사람들은 어둠을 빛으로 비추려고 합니다.




35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결혼한 며느리들은 시부모가 절에 다니거나 개신교에 다니면 성당에 다니지 않습니다. 가정의 불활 때문이지요. 그리고 심지어 개신교나 절로 옮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또 시부모가 그러시니 시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성당에 다닌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돌아가셔도 다니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며느리는 가족 모두를 가톨릭 신앙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냥 주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혈육에 대한 사랑과 관계는 내 신앙을 키울 수도 있고, 내 신앙을 없애 버릴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주일에 여행을 가자고하면 아내는 따라 나서야 합니다. 결국 성당에는 가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특전미사나 새벽미사를 하면 되는데 따라 나서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냥 어쩔 수 없다고 넘기는 것입니다.


내 가족들이 원수라는 말은 모두 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 신앙을 없애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고,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돌할 때에는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보다 인간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또 기억해야 될 말씀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 때문에 아들 딸을 버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이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고3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부모님들은 고3학생들을 성당에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잠도 못자고 피곤하니 주일 하루만이라도 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기간에 학생들이 성당에 가지 않으면 혼내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신부님! 제 아이가 시험이라고 주일에 성당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성당가라고 말을 하지 않더라구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아내에게 아무 말 못하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신앙이 우선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평일 미사에 나오세요. 형제님이 신앙이 없으시니까 그런 것입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도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미사 안나오면 신앙이 생기지 않는답니다.”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매일 미사에 참례하겠습니다. 그래서 참되게 가족을 사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가족들에게 원수였네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느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권면하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가족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성당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부모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떠한 뜻인지 당시의 유다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부터 약 20년 쯤 전에 로마인들은 유다인의 눈 앞에서 갈릴래아의 유다와 그 도당들을 수백 명이나 십자가에 처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십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으로 고통을 짊어지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벌써 저 골고타의 고통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라삐 나탄(기원 39년)은 “율법의 한 마디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지키며, 율법의 한 마디를 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중점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곳에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인간 생명의 목적으로 놓으시고,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잃는 사람, 곧 세상의 규범과 상반되는 복음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미래를 확립하기 때문에 자기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시간의 가치는 영원을 위하여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16,26)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제자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제자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를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선교사의 공덕이 그 선교사를 도와 준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유다인이 존중하고 있던 “손님을 환대한다”는 관념을 생각해 봅시다. 라삐 요카난(기원279년)은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율법의 학교로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라삐 유다(기원 299년)는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하느님 자신께 인사하는 것보다도 중대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열왕기 하권에 보면(4,8절 이하)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다가 수넴에 사는 여인으로부터 대접을 받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사를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그를 대접합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축복을 베풀어 줍니다. 아들이 없었던 그녀는 엘리사로부터 “내년 이맘때 같은 철이 돌아오면 부인께서는 아이를 낳아서 안게 될 것이오”라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여 그녀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나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환대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그가 하는 행동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 또한 옳은 판단을 하고, 옳은 행동을 하기에, 나 또한 옳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냉수 한 그릇”팔레스티나의 뜨뜻미지근하고 구역질나는 샘물이 아니라, 집 옆에 깊게 판 저 차디찬 우물 물 한잔을 타는 듯한 사막을 지나온 나그네에게 준다면 그에게는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내 제자라고 하여”,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다면, 그것 자체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 때문에 가족들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신앙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2.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구역모임, 레지오, 반모임, 기타 이런 모임에 나오라는 전화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알았어요. 갈께요.”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3. 나는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대접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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