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
의인과 죄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일까요?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나는 의인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던지는 돌에 많은 이들이 죄인으로 찍혀서 가슴 아파 할 것입니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하던 세리를 부르십니다.
9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세리는 징세 청부인, 곧 세금 징수관을 말합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어느 구역의 세금을 사 들입니다. 곧 우선 얼마의 금액을 국고에 내고(이를테면 그 구역의 세금 징수 권한을 사는 것입니다), 세금을 거두어들입니다. 국고에 낸 금액보다 많은 세금을 거둔다면 물론 그들의 소득이 됩니다. 이 징세 청부인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면 지방의 대표자, 곧 세관장을 파견합니다. 자케오는 세관장으로 그 밑에 세금 징수세리, 통행세 징수세리, 시장세 징수세리 등 여러 분야의 세리들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아주 욕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였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에 뱀처럼 지겨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로마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세리란 죄인과 같은 뜻을 가진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태오는 단순한 세리로 아마 가파르나움 시장의 하급 세리로 읍내로 들여오는 화물의 세금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마태오는 마르코와 루가가 말하는 “레위”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코와 루가는 마태오라고 쓰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해 예로니모 성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사가들은 마태오에 대한 존경과 세심한 배려 때문에 마태오의 별명인 ‘레위’라고만 쓴 것 같다. 그러나 마태오 자신은 자기 일을 ‘세리 마태오’라고 뚜렷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즉 마태오도 요한이 사랑하는 제자라는 말로서 자기의 이름을 감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낮추어 자기 이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런데 아무런 설명이나 조건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도 아무런 조건 없이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을 끌어 들이듯이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쇠붙이가 자석에게 끌려가듯이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피조물의 주인께서는 자신이 바라시는 대로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으신 것입니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마태오는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모십니다. 마태오는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을 불러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죄인으로 판명받았던 그들이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 항상 당하기만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직접 시비 걸 용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율법을 지키는 이들이 죄인들이나 부정한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있을 수가 없는 일이고, 비위가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유다인의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가 없었고, 재판할 때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도박, 고리대금, 도둑질, 깡패, 그 밖에 일반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않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세리나 죄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금령은 없었으나, 율법학자들은 그런 교제를 위험한 일이라 하여 금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이 금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사도10,28-29;11,2-3;갈라2,12)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제자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직접 대답을 해 주십니다. 의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분은 병자이며 죄인인 세리를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건강한 의인(?)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한방 먹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이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라 하여 멀리하는 그들이 어떻게 의인이라고 불리 울 수 있으며 어떻게 그들의 목자라고 불리 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완고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느님께서는 호세아(6,6)의 입을 통하여 당신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단 위의 제물을 바치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마음에 사랑과 자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존경하는 예배의 중심입니다. 만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불행한 죄인을 불쌍히 여겼다면, 율법을 세밀히 지키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 즐겁게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람을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착한 사람보다도 더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자비입니다. 나는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의 의사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까이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리, 죄인, 창녀는 착한 사람임을 자칭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도 더욱 더 하느님 나라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의인입니까? 예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죄인입니까?
2.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힘든 사람과 함께라면 밥이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과 함께 하고 싶습니까? 나는 또 어떤 사람이 함께 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