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바오로)

 

윤지충(바오로)은 1759년(영조 35) 전라도 진산군 수심대(水心대 :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라는 곳에 살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조상들은 해남 섬의 양반으로 자주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중 여럿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는데 부친 윤 경(尹憬)은 의업으로 생활하면서 결혼한 후 진산에서 정착하였다.


  ‘우용’이라고도 불리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단정한 품행이 뛰어났으며 학문에도 열심이어서 일찍 평판을 얻게 되었다. 1783년 그가 25세에 이르러 진사가 되자 그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진사가 된 이듬해 바오로는 서울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金範禹․토마스)의 집에 갔다가 천주교 서적 두 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가서 필사하였다. 그 당시 그가 이해한 교리의 내용을 훗날의 공술서(拱述書)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ꡒ중인 김범우의 집에 우연히 들렀더니, 그 집에 「천주실의」라는 책과 「칠극(七克)」이라는 책, 이렇게 두 권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대충 읽으니 천주는 우리 공동의 아버지시요,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중국 책에서 상제라고 부르는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태어났는데, 비록 살과 피는 부모에게서 받으나 사실은 천주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육신과 결합하는데, 그것을 결합시키는 이도 천주이십니다. 임금께 대한 충성의 근본도 천주의 명령이요, 부모께 대한 효도의 근본도 역시 천주의 명령입니다. 이 모든 것을 중국의 경서에 실린 ‘상제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라’는 계율과 비교해 본 결과 거기에는 같은 점이 많다고 믿게 되었습니다.ꡓ


  그러나 아직 이를 실천하지는 않았다. 3년쯤 후에 그는 사촌인  정약전(丁若銓)에게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체적으로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심으로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갖고 있던 천주교 서적의 일부를 불살라 버렸으나 그래도 비밀히 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북경 주교로부터 부모를 위한 제사와 다른 미신을 금하라는 서신이 국내에 들어왔고, 바오로는 즉시 이에 복종하여 자기 집안에 보존하고 있던 신주를 불살라 버렸다. 이러던 중 1791년 여름 그의 모친 권씨(權氏)가 별세하였다.


  권씨의 죽음을 들은 바오로의 친척과 친구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는 최소한 외면적으로라도 자기의 신앙을 버려 하느님을 배반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윤리를 저버린 대가로 비난과 욕설을 받아야 하던지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천주교 교리를 따르는 그의 고상하고 곧은 마음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상복을 입고 어머니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였으며, 극진한 효성심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체면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다. 그렇지만 위패(位牌)를 만들거나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다. 친척과 친구들은 곧 불평을 터뜨리고 양반집 자식으로서 일찍이 없던 윤리 파행에 통탄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 소식은 멀리까지 퍼졌으며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바오로를 불효자로 지목하였다. 이웃 사람들은 인륜의 모든 것을 저버린 사람이라하여 모욕과 위협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의 용감한 마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평온한 자신의 양심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욕설과 모함을 당한 구세주의 본보기를 마음에 지니고 있었다. 시련이 거셀수록 주님의 은총도 더 강하여 바오로는 자신의 용감한 신앙 고백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외종사촌인 권상연(權尙然․야고보)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하여 그와 같은 비난을 받고 있었다.


  천주교인으로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당시 천주교의 전파를 반대하던 홍낙안(洪樂安)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즉시 체제공(체濟恭) 정승에게 청원을 하여 바오로를 사형에 처하라고 종용하였다. 동시에 그는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편지를 보내어 바오로의 집을 수색하고 죄인을 체포하라고 재촉하였다. 당시 양반집을 수색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군수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이를 시행하였다.


  집안을 수색하는 도중 나라에서 위패를 넣어 두는 데 쓰이는 상자를 발견하였으나 그것은 비어 있었다. 신사원은 곧 바오로와 야고보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들이 피신하고 없었기 때문에 바오로의 삼촌을 볼모로 잡아 가두었다. 이상의 사실은 훗날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불리어졌으며, 이 사건이 바로 신해교난(辛亥敎難)의 시작이 되었다.


  자신들에게 체포령이 내렸다는 사실과 삼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군수에게 자수하기 위하여 피신지 공주를 떠나 1791년 10월 26일에 진산 관아에 도착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바오로는 군수 앞에 불려 나갔다. 군수와 바오로가 대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군수가 물었다. ꡒ너 그게 무슨 꼴이냐? 어쩌다가 그 꼴이 되었느냐?ꡓ


  그러자 윤지충이 대답했다.


  ꡒ무슨 말씀을 물으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ꡓ


  ꡒ너에 관해서 아주 중대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것이 근거있는 말이냐? 네가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 사실이냐?ꡓ


  ꡒ저는 결코 이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를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ꡓ


  ꡒ그래, 그것이 이단이 아니란 말이냐?ꡓ


  ꡒ아닙니다. 그것은 바른길 입니다.ꡓ


  ꡒ그렇다면 복희(伏羲)때로부터 송조(宋朝)의 성현들에 이르기까지 실천한 것이 모두 거짓이란 말이냐?ꡓ


  ꡒ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계명 중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교할 생각은 없고, 다만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ꡒ너는 조상들에게 제사 올리기를 거절하는데, 짐승도 제 어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느냐? 더구나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될 법이나 한 일이냐? 공자의 글에서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든 규칙을 따라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모든 규칙을 따라 장례를 지내 드리고, 끝으로 규정된 예식을 따라 제사를 올린 사람만이 자기가 효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 대목을 읽지 않았느냐?ꡓ


  ꡒ그 모든 것이 천주교 책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ꡓ


바오로는 거리낌없이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군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ꡒ참, 아깝구나. 네 집안의 명성은 많은 세대를 내려오며 네게 이르기까지 줄곧 높아져 왔는데, 그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구나. 너 자신도 재주가 많은 학자의 명성을 가졌었는데, 네 정신이 미숙하고 경솔하여 네 조상들의 공경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네가 그렇게 하는 줄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즉시 가서 권고하고 네 눈을 뜨게 하여 이런 극단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과거에 성현들도 불도와 노자의 도에 오랫동안 헤매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으면 아직도 너는 그분들의 영광스런 자취를 따라 걸을 수가 있을 것이다.ꡓ


  ꡒ제가 마음을 바꿀 수가 있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ꡓ


  ꡒ그렇다면 이제는 너를 더 나은 생각으로 이끌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해 볼 것이 남지 않았구나. 나로서는 네 운명을 결정하기도 싫고 너를 자세히 신문하기도 싫다. 네가 감영에 가서 네 소행에 대하여 보고해야 할 것이다. 네가 부모에게서 받는 그 몸을 너는 어리석게도 형벌과 죽음을 당하게 하려느냐? 뿐만 아니라 너로 인하여 네 삼촌이 늙으막에 옥에 갇혔으니, 그것이 효도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냐?ꡓ


  ꡒ형벌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덕을 닦는 것이 효도를 어기는 것입니까? 제 삼촌이 옥에 갇히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는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려와 사또에게 자수하였습니다. 이것이 효도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까?ꡓ


  이에 군수는 그를 법대로 다루라고 명령하여 목에 무거운 칼을 씌우도록 하고 그를 옥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그 날은 이렇게 끝났다.


  27일은 별다른 사건 없이 지나갔다. 28일 아침 바오로의 외종 사촌인 권상연(야고보)도 자수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다. 야고보도 같은 질문을 받았고, 그와 똑같이 대답하였다. 그리고 군수는 바오로의 삼촌을 불러다가 길게 조위(弔慰)의 말을 한 뒤에 다음과 같이 물었다.


  ꡒ그대가 아는 아무개 아무개처럼 해서 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없었단 말이오?ꡓ


  바오로의 삼촌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관아에서 나갔다. 저녁 무렵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다시 불려 나갔다. 큰 칼이 벗겨지고 작은 칼이 씌워졌다. 군수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ꡒ너희는 전주로 가게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선비들의 도를 따라 즐거운 길을 가지 않고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이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ꡓ


  그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대답을 얻지 못하자, 군수는 그들을 내보내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형사 문제를 담당하는 사령과 포졸 한 명과 옥리 한 명이 동반하였다.


  29일 새벽에 길을 떠난 그들 일행은 해가 질 무렵에 그들을 인수하러 오는 감영 나졸들을 만났다. 그들은 남문 밖에 있는 감영으로 끌려갔다. 나졸들은 주위가 캄캄하고 밤이 이슥하였으므로 좌우에 횃불을 켜놓고 그들을 중군 아문(中軍衙門)으로 끌고 갔다.


  날이 완전히 밝자, 그들은 중군의 옥에서 감영 감옥으로 압송되었고, 오후에 감영에 불려나가 신문을 당하였다. 감사는 바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ꡒ경서(經書)를 배웠느냐?ꡓ


  ꡒ배웠습니다.ꡓ


  ꡒ네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는데 우리 경서가 부족하단 말이냐? 어찌하여 미신에 빠졌단 말이냐?ꡓ


  ꡒ저는 결코 미신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ꡓ


  ꡒ그래, 천주교라는 종교가 미신이 아니란 말이냐?ꡓ


  ꡒ천주는 가장 높으신 아버지시요,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창조주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ꡓ


  ꡒ그 도리를 간단하게 추려서 말해 보라.ꡓ


  ꡒ우리가 있는 곳은 범죄 사실을 심의하는데 적당한 자리이지 교리를 설명하는데 적당한 자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으로 요약됩니다.ꡓ


  ꡒ네 책을 누구에게서 받았느냐?ꡓ


  ꡒ그 사람을 댈 수 있겠습니다만, 그 사람이 제게 책을 빌려 줬을 때는 임금님의 금령(禁令)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빌려 준 사람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엄중한 금령이 있어 만일 제가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 그는 자신이 아무 죄도 없으면서 혹독한 형벌을 당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제가 그런 결심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저는 그를 밀고할 수 없습니다.ꡓ


  ꡒ그렇지 않다. 네가 그의 이름을 대더라도 금령 전에 네가 책을 빌려 준 그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인해서 죄가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고문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대라.ꡓ   


  그는 오랫동안 대답을 안 하고 있다가 사촌 야고보가 재촉하자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얻은 이야기와 그 밖에 교리나 제사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감사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11월 1일 새벽에, 진산군수가 그들을 불러 문간 같은 곳에 앉히고, 한 아전을 시켜 그들에게 ꡒ십계와 칠극을 외어라ꡓ고 하였다. 그들이 그것을 외우자, 그들을 다시 불러 몇 마디 권고를 하고 나서 말하였다.


  ꡒ어제 너희들이 말한것은 진실이 아니어서 판결을 내리기에는 충분치 않다. 그리고 또 이 교(敎)에는 십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신민(臣民)의 관계는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이 임금을 인정하지 않거나 임금을 업신여기는 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ꡓ


  윤지충은 대답하였다.


  ꡒ그렇지 않습니다. 임금님은 나라의 어버이시고, 관장(官長)은 그 고을의 어버이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에게는 충성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제4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ꡓ


  ꡒ그렇다면 제4계에 그런 뜻의 주(註)를 달아서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교(敎)는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이 그 교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고, 또 그 교가 부모와 임금을 무시하는 불교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면, 어찌하여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고 부모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느냐? 음식은 바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 효성을 드러내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 이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있다면 그것을 자세히 지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너는 어제 ‘살기를 원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심정’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깊이 생각하고 또 네가 진술을 할 때에 임금께 대한 충성과 효성의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목숨을 보존할 방도를 찾아내는 것이 옳겠다.ꡓ


  사건 심리를 맡은 현령도 그에게 와서 조용한 말투로 말하였다. 윤지충은 현령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사또께서 제게 말씀하는 것은 모두 하고 싶습니다. 다만 말로는 모든 것을 명백히 설명할 수가 없으니, 제게 아전 한 사람과 붓을 주시면 모든 것을 자세히 쓰게 하겠습니다.ꡓ


  그러자 현령은 그를 다른 방으로 들여보내 공술을 써서 바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쓴 공술서 중에서 제사나 신주에 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ꡒ양반 집에서 관례로 되어 있는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제가 그 종교를 따르는 이상 거기서 명하는 것에 복종하지 않고 달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4계가 ‘우리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므로, 만일 사실로 우리 부모들이 그 신주안에 계시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도 누구나 신주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들은 저의 살이나 피나 목숨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영혼이 일단 이 세상에서 나가면 그런 물질적인 물건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의 명칭은 아주 위대하고 매우 존경받을 만한 그 무엇인 만큼, 어떤 일꾼이 만들어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다가 제 부모를 삼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른 이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은 그것을 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로 인하여 말씀대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천주께 대하여 죄인이 되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신주들을 저희 집 땅속에 묻었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불살랐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마는 우리 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뚜렷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없으므로 누가 그런 비난을 하였고 누가 그것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은이들 이나 그 위패에 술과 음식을 드리는 것으로 말하면, 그것도 천주교에서는 금하는 것이니, 이 교를 따르는 자들은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과연 조물주께서 여러 가지 종류의 피조물을 마련하실 때에 물질적 피조물은 물질적인 것을 쓰고 비물질적 피조물은 비물질적인 것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대문에 물질적 양식이 육신의 음식인 것처럼 덕행은 영혼의 음식입니다. 훌륭한 술과 맛있는 음식이 있다 하더라도 비물질적 존재가 물질적인 것으로 양육될 수 없다는 이치로 영혼을 기를 수는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그들이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섬겨야 한다’고 하였고, 이것이 우리나라 경서의 근본 원칙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에 그들의 영혼이 술과 다른 양식으로 결코 양육되지 않았던 만큼, 죽은 후에는 더구나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아무리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도 주무시는 동안에는 그분들에게 음식을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자는 동안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더구나 그분들이 죽음이라는 긴 잠이 드셨을 때, 그분들에게 음식을 드리는것은 헛된 일이요 거짓 행동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를 헛되고 거짓된 행동으로 공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에게는 아무런 참다운 향기도 없는 음식을 쓰는 것을 그만두고, 온 힘을 기울여 덕행을 닦는 데 전심하여 그 결과를 그분들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동시에 우리 영혼도 기르는 것이 참된 길이요 바른 도리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발탈당해야 한다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햐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가 신주를 땅에 묻기 전에 불사른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순교하기 전 감사의 신문에 그는 신주를 불살라서 묻었습니다ꡓ라고 분명히 대답하고 있다.


  그들이 전라도 감영에서 신문을 받고 있는 동안 조정에서는 상소가 빗발치고 대신들의 청원도 잇달았다. 채제공 정승과 정조 왕은 마침내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를 참수형에게 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왕의 재가를 받은 명령은 곧 전라도 감영으로 득달하였으며, 감사는 그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와 형장으로 향하였다.


  매를 맞아 쇠약해진 권 야고보는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튼튼한 윤 바오로는 즐거운 표정으로 나아가며 의젓하게 교리를 설교하여 천주인들뿐만 아니라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하게 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관리는 마지막으로 배교를 하고 조상의 신주를 공경할 것이며 국왕에게 복종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윤 바오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말하고 나서 결안(結案)을 받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런 다음 머리를 나무토막 위에 누이고 여러 번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는 침착한 태도로 목을 치라는 신호를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망나니의 칼날이 윤 바오로를 순교하게 하니, 때는 1791년 12월 7일로 그의 나이 3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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